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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Jan 31. 2020

금요일 밤, 서울행 도로 위에서

금요일 저녁, 서울행 도로는 막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유은이와 둘이 친정집에 가는 길이었다.


출발은 그래도 순조로웠다. 촉촉한 초코칩 하나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유은이는 창문 밖에 보이는 것들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서쪽 방향으로 가는 도로는 유난히 하늘이 붉었고, 저녁 무렵의 도시 풍경은 충분히 낭만적이었다. 유은이가 하도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에 목소리를 담고 싶었다.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을 끄고,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을 시작한 것이 무색하게, 유은이는 노래를 마무리 짓더니 친할머니네 집에 가고 싶다고 하기 시작했다. 친할머니네 집에 대한 찬양을 노래로 부르다가, 점점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영상을 담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얼른 카메라를 껐다. 그러자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엄마, 나쁜 건 아빠한테 보내지 마요.”

“응? 나쁜 것?”

“응, 내가 화낸 거, 아빠한테 보내지 마요.”

언제부터 촬영을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동영상 찍는 것을 알고 일부러 노래를 안 부르고 떼를 쓴 모양이다. 눈치 빠른 아이와 한걸음 느린 엄마다.


이제 왼편으로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슬슬 과자발이 떨어졌는지, 짜증을 내기 시작. 이번에는 츄파춥스 포도맛 사탕이다. 실은 츄파춥스는 살면서 별로 사본 적이 없는 품목인데, 최근 평생 구매한 양보다 많은 양을 구매하고 있다. 아이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아이를 달래는 데에 막대 사탕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태우고 혼자 운전을 하다 보면 별의별 상황(카시트 안전벨트에서 양팔을 다 빼고, 발로 앞 좌석을 찬다. 창문을 발로 찬 적도 있음)이 다 생기는데, 극적인 타협을 위해서는 별수 없이 간식이 제일이었다. 막대 사탕 하나면 1시간 정도는 거뜬하다. 물론, 깨서 먹지 않고 빨아먹도록 해야 한다. 츄파춥스 힘에 빌어, 오늘 밤 운전도 이대로 무사히... 끝나는 걸까?


그런데 금요일 밤의 정체는 츄파춥스 사탕 하나가 녹아 없어질 때까지 풀릴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의 운전을 가장 위태롭게 만든 사건이 시작된다.

    

“엄마, 쉬 마려워~”

큰일이다. 내비게이션이 계산한 남은 시간은 1시간, 지금 우리는 앞뒤 꽉 막힌 강변북로 위. 어떡하지? 어떡하지? 불안에 찬 눈동자는 허공을 두리번두리번, 화장실 따위가 있을 리 없는 자동차전용도로이다. 그냥 도로 위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 지도를 뒤져, 화장실이 있을 법한 가장 가까운 건물을 찾았다. 한강대교 위의 노들 카페? 그런데 차가 막혀 거기까지 갈 방법도 보이지 않고 답답했다. 이 지긋지긋한 서울의 교통정체가 미웠고, 이런 예측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이를 데리고 길을 나선 내가 미웠다.

네 살 아이에게 소변을 참으라고 하다니. 저 어린 것이 참고 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아이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유은아. 엄마가 쉬 참게 해서 미안해.”

그랬더니, 아이에게서 이런 말이 돌아왔다.

“아니야, 엄마. 내가 쉬 마려워서 미안해.”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엄마가 미안하지.”

“아니야~ 미안하긴 뭘~ 지금 할머니네 가고 있는데, 뭘~ 괜찮아, 뭘~”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서 내 평소 말버릇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어쨌든 위급한 상황 속에서 엄마 걱정을 해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우린 결국, 친정집을 조금 남겨두고 옆 동네 아파트 단지의 길가에서 해결했고, 후련한 마음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도착한 집. 친정엄마를 보자마자, 오늘의 험난한 여정 이야기를 정신없이 풀어 놓았다. 유은이의 엄마 말투 흉내 냈던 이야기도 물론 빼놓지 않았다.

“유은이가 하는 말을 보면, 내 말을 흉내 내는데, 엄청 예쁘게 말해. 내가 평소에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나?”

“아니야, 너 유은이한테만 예쁘게 말해.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말 안 하는데, 유은이한테는 진짜 예쁘게 말하더라고.”


단호박 같은 우리 엄마였다. 옆에서는 유은이의 소울메이트인 외할아버지와 단둘이 꽁냥꽁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엄마와 단호박 같은 대화를 나눈다. 한 시간 전, 위태로웠던 강변북로의 자동차 홍수 속에서 그렇게도 닿고 싶었던 우리 집. 집의 포근함을 느끼면서, 아이와 절대 해선 안 되는 일 한 가지를 깨달았다. 금요일 밤 서울행 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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