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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Jan 31. 2020

저녁 7시, 전화벨이 울리고

월요일 저녁 7시, 전기밥솥 옆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린다.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전화다. 저녁 7시의 전화 한 통으로 나이트 라이프는 결정된다.  

   

“지현아, 오늘 늦을 것 같애. 먼저 저녁 먹을래?”

역시나 남편의 전화가 맞았고, 위의 대사를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읊었다. 그래서 오늘의 나이트 라이프는 버전 2로 진행한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나이트 라이프의 버전 1과 2의 차이는 음주의 여부로 나뉜다. 단순하지만, 저녁 풍경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버전 1은 평소의 루틴을 말한다. 아이용과 어른용 저녁을 따로 준비해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식후에는 설거지하면서 놀아주거나, 놀아주면서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아이 목욕을 시키면서 놀아주거나, 놀아주면서 아이 목욕을 시킨다. 놀아주면서 재우거나, 재우면서 놀아주거나? 아무튼 길고 긴 평상시 루틴은 좀 정신없다.


버전 2는 대부분이 생략된다. 일단, 저녁 준비는 배달의 민족에게 맡긴다. 그리고 같이 놀다가 잔다. 끝! 아주 심플하고 시간도 금방 간다.     


아무튼, 오늘 저녁 배달은 피자로 정했다. 배달은 역시 피자다. 피자가 좋은 점은 아이에게 밥 먹으라는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혼자서도 알아서 자알 먹는다. 그래서 오늘도 피자다. 식탁 위엔 레귤러 피자 한 박스와 분홍색 플라스틱 물컵 하나, 와인 잔 하나.


짠~을 하며 나이트 라이프의 시작을 알린다. 유리잔과 플라스틱 컵이 부딪치면서 오는 둔탁한 소리의 아쉬움은, 네 살 어린이의 목소리로 듣는 “짠~!”의 청량함으로 달랜다.

술 한 잔이면, 난 네 살 유은이와 동기간이 될 수 있다. 딱 한 잔으로.


유은이는 엄마가 술을 마시는지 주스를 마시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술을 마셨을 때의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눈빛이 그렇다. 술을 안 마셨을 때의 엄마는 잘 볼 수 없었던 눈빛을 보여준다. 반짝반짝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 뽀로로를 직접 만났을 때와 같은 눈빛.     


우리는 각자 저녁 식사를 하고 함께 논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목청껏 큰 소리로 대화도 나눈다. 식사 자리에서부터 오른 흥은 놀이 자리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는 엄마였다가, 괴물이었다가, 당나귀였다가, 의사였다가, 성욱이*였다가, 아기도 된다(다중인격 아닙니다. 역할 놀이 중입니다.) 물론, 음주 가무도 빠지지 않는다. 유은친구가 요즘 유행하는 동요를 요청하면, 나는 벅스에서 검색한 후 블루투스를 이용해 오디오로 틀어준다. 그러면 친구는 핫한 율동까지 가르쳐준다. 1층이니까 하며 마구 뛰어대다가, 정신이 들면 소파 위에 올라가서 뛰기도 한다.     


때로는 고민도 들어준다. 친구는 맞장구를 참 잘해준다. 가장 높은 수준의 맞장구가 마지막 말을 따라서 반복해주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내 친구가 딱 그 수준이다. 내 말을 반복해서 말해주는 맞장구(맞장구 맞겠지?)를 듣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러니 내가 술 마시면 네 살과 동기간이 된다고 고백하지 않았겠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빠의 빈자리가 무색해져 버렸다.

(스피커폰) “지현아, 먼저 저녁 먹어~” 소리에,

“아빠 안 온대?”라고 하는데 눈빛에 아쉬움이 전혀 안 느껴진다. 내가 다시 핸드폰을 들어 배달음식을 주문하기라도 하면, “피자!” “피자!” 소리를 지르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온 집안을 뛰어다니는 것이다(남편아 미안.) 아빠 없이도 너무나 잘 지내는 모녀를 남편은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서운해할까.     


야근 많은 남편 대신 혼자 마시던 반주는 어느 순간, 혼술이 아닌 함께하는 술자리가 되었다. 혼자 컵을 들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짠을 가르쳤으니, 유은이가 짠 문화를 접한 지 2년째다. 시도 때도 없이 짠, 짠 해대서 민망하긴 하지만, 어쨌든 술자리 예절은 확실히 배운 듯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술자리엔 빠지지 않는 것이 건배사이니, 너에게 건배사를 부탁해도 될까. 올 연말도 친구들이 아닌, 너와 함께 보내게 될 엄마를 위해 건배해주겠니.



*성욱이 : 어린이집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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