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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Aug 25. 2022

'챙겨라' 탑


“얘 저거 미리 챙겨라.”


5단 접이식 우산을 가리키며 딸에게 말했다. 


“헤어 브러시 저것도 챙기고. 저 방에 가서 종이가방 가져다가 담아 놔.”


딸이 킬킬 웃으면서 챙긴다. 


솔직히 오늘 내 몸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다. ‘토사곽란’에서 ‘토’만 빼고 ‘사’와 ‘곽란’이 너무 심하게 있었다. 점심에 오래된 청국장을 먹은 게 탈이 난 것 같다. 먹고 잠시 후부터 갑자기 배가 찌르르하더니 위장에서 천둥이 우르릉 쾅 거리고 작은 창자에 번개가 번쩍번쩍 꽂히는 기분이 들었다. 급히 달려가 변기에 앉았는데 내 복부를 뚫고 용이 승천하는 것 같은 용트림의 고통이 느껴졌, 으윽... 다...... 거의 한 시간을 그랬다. 그냥 막 오늘 서울 경기 지역 물난리 같은 일이 내 뱃속에서 일어났다. 


딸에게 오지 말라고 전화할까 망설였다. 딸 주려고 저기 장흥까지 연락해서 받아 놓은 포도는 어떡하고 뽀득하게 씻어 놓은 복숭아들은 어쩌나. 딸이 복숭아 먹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감자전 해준다고 오라고 한 건데. 지사제를 찾아 먹고 배에 뜨거운 찜질을 하고 누워있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땀이 귀로 흘러드는 것이 느껴진다. 잠결에 딸이 손을 잡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눈이 안 떠지고 목에서 말이 안 나온다. 딸은 살그머니 거실로 나간다. 


다행히 더 이상 배는 안 아프다. 딸을 따라 나와서 다시 지사제를 한 알 더 먹고 감자를 찾아 씻는다. 철판을 달궈 지글지글 지져 주니 잘 먹는다. 엄마가 감자전 해준다고 해서 맥주도 사 왔다고 수다를 떨면서 꼴깍꼴깍 냠냠 잘 먹는다. 그걸 보니 나도 먹고 싶어 진다. 참아야지. 


아르바이트를 갔던 아들이 비를 맞고 돌아왔다. 아들 것도 두어 장 부쳐준다. 일하고 비 맞고 왔으니 배가 고프겠지. 후루룩 뚝딱 잘 먹는다. 


굵고 거센 물줄기로 나무며 땅이며 집이며 동네 곳곳을 훑어대던 비가 잠시 멈췄다. 이 참에 빨리 딸을 보내야겠다.


“포도, 이거 얼렁 싸라. 복숭아도.”


“내가 다 가져가? 엄마 안 먹어?” 


“응, 난 비 그치면 사 먹을게. 너 다 가져가.”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가 나한테 이랬는데.


“아, 나 너네 외할머니 같아.” 


딸이 우산을 챙기던 아까보다 더 크게 웃는다. 


엄마가 그랬지. 엄마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냉동실에 생선 있다, 챙겨라. 떡도 줄까? 거기 쌀통 앞에 사과 있어. 냉장실 서랍에 훈제 오리 있다. 그거 홈쇼핑에서 샀는데 한 번에 먹기 좋게 조금씩 담겼더라. 내가 들은 척 안 하고 앉았으면 검은 비닐봉지를 찾아서 주섬주섬 담아 현관 앞에 탑을 쌓아 두셨지. 심지어는 꽃도 챙겨 주셨지.


그래도 난 아직 검은 봉지 꺼내러 종종거리며 다니지도 않고 입으로만 ‘챙겨라’ 탑을 쌓고 있으니 아직 할머니는 아니다. 닮아가고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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