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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Sep 23. 2022

바람 가지 끝에 지난 시간 꽃이 핀다

꽃을 정리한다. 마른 꽃을 정리한다. 집안 여기저기 놓여있던 꽃들이다. 봄부터 내 집에 들어와서 같이 계절을 보낸 꽃들이다.

작은 유리그릇에 들어있는 저 프리지어는 이른 봄에 들어왔다. 말라서 바삭해졌지만 색은 그대로이다.  새부리 같은 저 꽃을 보면 거실 바닥을 따뜻하게 비추던 봄날 그때의 햇살이 떠오른다. 깊고 노랗고 따뜻하던 햇살이었다. 아직 겨울이 남아 시리던 2월의 발가락을 부드럽게 덮어주던 햇살이었다.


여름에는 수국이 탁자 위에 놓였었다. 크고 탐스러운 수국 꽃이 오래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꽃이 시들해지자 베란다에서 말렸다. 물기가 빠진 꽃은 색이 진해졌다. 푸른 잉크색이 도는 마른 수국 한 가지를 여전히 탁자에 두고 오며 가며 눈길을 주었었다. 6월은 지났지만 아직도 여름의 서늘하게 우거진 그늘이 느껴진다.


가을을 알리던 무렵에는 부추꽃을 잘라다가 주방에 놓고 즐겼다. 잔별들이 소복하게 모여있는 것처럼 피어서 지나칠 때마다 흐뭇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것들은 열매가 귀엽다. 연초록의 동그란 열매들이 달린 채로 꽃대가 휘어진다. 그렇게 시들고 말랐다. 9월 내도록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린아이들 머리에 달린 동그란 방울처럼 생긴 천일홍 꽃도 몇 송이 있다. 산책하다가 몇 송이 뜯어왔다. 갓 피었을 때도 말랐을 때처럼 바스락거리는 촉감을 가진 꽃이다. 시들어도 선명한 자줏빛의 꽃색이 변함없다. 천일홍은 겨울까지 두고 즐겨야겠다.


꽃들을 치운다. 마른 꽃들을 치운다. 프리지어를 치우고 수국을 치우고 부추꽃을 치운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인다. 꽃이 치워진 자리에 바람이 들어와 앉는다. 프리지어가 있던 자리에는 프리지어처럼 노랗게 수국이 있던 자리에는 수국처럼 푸르게 부추꽃이 있던 자리에는 부추꽃처럼 하얗게 앉는다. 꽃들이 사라진 자리에 지나간 계절이 피어난다. 한들거리는 바람의 가지 끝에서 봄과 여름과 추석 전 초가을의 시간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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