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붉었고 십일 월은 안개

by 최희정

"걷는 거 좋아하세요? 좀 걷고 싶어요."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슈우우웅. 콘크리트 교각 위로 열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당산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강을 건너 합정역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굵고 커다란 교각 아래를 지나자 골목이 나온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들이 모여 있다. 색이 바랜 철문 귀퉁이에 녹이 슬어 있다. 세월의 흔적이다. 전봇대 노란 불빛 아래 푸른색 플라스틱 화분에 붉은 꽃이 보인다. 사루비아다. 깨꽃 혹은 꿀꽃이라고 하는.


​​하얗게 이글거리는 여름 대낮을 선명하게 달구던 붉은 꽃이 겨울을 코앞에 둔 11월 하순에도 피어 있다. 아니 여름내 피다가 아직 ​남아있다. 끝맺음을 해야 할 적당한 때를 놓친 어색한 모습으로 화분에 담겨 밤의 담벼락에 시든 어깨를 기대고 있다.


붉었던 여름의 흔적을 지나 골목의 어느 굽이를 돌아 계단을 올라가자 묘지들이 있는 공원이 나왔다. 오래전 먼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무덤과 낡은 비석 사이를 걷는다. 비석에 적힌 이름을 읽어준다. 얼마나 오래전에 이 나라에 왔는지도 말해준다.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묘지를 지키던 나무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밤의 방문객들이 낯설다. 밤바람이 조용히 가지에 걸터앉는다. 달빛도 내려와 나란히 앉는다. 나무와 달빛과 바람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려 애쓴다.


슈우우웅. 마침 합정역을 출발한 기차가 한강을 건너가는 소리가 커진다. 나무가 한숨을 쉰다. 가지가 떨린다. 마른 잎들이 두 사람의 발 앞에 떨어진다. 툭. 발길 뒤에도 떨어진다. 툭툭.


강에서 안개가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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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목 가로등 옆에 올해도 붉은 여름 꽃이 남아 있는지 가보고 싶다. 올해의 내 여름이 붉었으므로.


죽은 자들의 공원에 다시 가보고 싶다. 가서 묘지를 지키는 나무에 기대고 싶다. 나뭇가지에 앉은 바람에게 아직 보내지 못한 붉은 여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작년 그날은 보름달이 떴었다. 모든 일을 다 보았다. 오늘은 달이 흔적만 있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십일월의 강은 여전히 안개가 올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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