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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Dec 01. 2022

바람이 켜는 관현악

산책을 하는 작은 숲에는 둥그런 공터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공터를 빙 둘러서 있다. 봄에는 중간 정도 키의 산수유나무에서 아른아른 노란 꽃이 피고 그다음에는 키가 큰 벚나무에서 꽃이 핀다. 벚꽃 잎이 바람에 날려 하랑하랑 떨어지고 나면 키가 작은 철쭉들이 핀다. 작은 키의 철쭉은 진한 분홍색으로 존재감을 강하게 나타낸다.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되면 모든 나무들의 잎들은 충분한 물기로 탱탱해지고 싱싱하게 자란다. 이무렵 숲에 바람이 불면 파도 소리가 난다.

​바람 부는 가을 숲은 관현악단 같다. 특히 늦가을 밤에 더 그렇다. 또 모습도 달라진다. 여름에는 무성한 이파리들이 나무의 모습을 부풀리고 나무끼리 서로 포개져 나무 고유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가을이 되고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은 하나하나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치 검은 연미복을 차려입은 연주자들이 모여있는 것 같다.


잎이 다 사라져 버린 나무들은 바람을 만나 제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숲의 맨 앞줄에서 철쭉이나 장미 등의 나지막한 관목들이 제 가지들을 앞뒤로 흔드는 모습은 마치 얌전히 앉아 팔을 앞뒤로 움직이며 활을 켜는 비올라나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연주자들 같다. 그 뒤로 자리 잡은 화살나무 무리는 목관악기 같다. 잔가지에 목피가 변한 날개를 달고 있는 화살나무는 검은색 몸체가 돋보이는 오보에나 바순 같은 목관악기의 느낌이 난다. 소리가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화살나무 뒤로 벚나무처럼 좀 더 키가 큰 나무가 관악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더 뒤로는 밤나무나 참나무들이 우뚝우뚝 서있다. 그 모습이 마치 첼로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같기도 하고 큰북이나 팀파니를 두드려대는 모습처럼도 보인다.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공터에 딱 서면 마치 내가 지휘자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진짜 지휘는 바람이 한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 나무들이 만드는 소리가 바람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켜켜이 달라진다. 고요한 바람이 작은 나무들을 어루만질 때와 센 바람이 커다란 밤나무들을 흔들어댈 때의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절정의 순간을 향해가는 지휘자의 손놀림처럼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숲의 모든 나무들이 정신없이 머리와 팔과 몸을 움직인다. 마치 관현악단의 모든 악기의 연주자들이 동시에 연주를 하는 피날레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순간 바람이 잔잔해진다. 연주가 끝났다. 다시 바람이 분다. 관객들의 박수소리다. 공중에서 무대 위로 반짝거리는 은종이가 날린다. 눈송이다. 바람의 연주를 끝낸 숲에 올해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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