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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Dec 07. 2022

내가 나를 먹여 살리는 시간

생생 낙지 초무침


며칠 동안 빗물 웅덩이에 떠 있는 낙엽 같은 잠을 잤다. 길고 따뜻한 잠은 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러더니 어제부터 배고프고 졸리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오이를 샀다. 찬물을 틀어 오이를 씻는다. 오돌도돌한 돌기를 문지르며 박박 씻는다. 양파를 깐다. 하얀 양파를 씻으니 뽀독뽀독해진다. 놓치는 양념이 없게 미리 챙긴다. 고추장과 고춧가루와 식초와 설탕과 마늘과 파, 가장 기본만 넣는다. 오이 두 개를 둥글고 납작하게 썬다. 찹찹 찹찹 찹찹 찹찹. 우주에 행성들이 굴러다니듯 둥근 오이 조각들이 도마 위를 굴러다닌다. 양파도 썬다. 둥근 양파를 반을 가르고 납작한 면을 아래로 놓고 썬다. 양파의 중심을 향해 1센티 두께로 채를 썬다. 삭삭삭삭 삭삭삭삭. 양파를 이렇게 썰 때는 달이 하루하루 작아지는 것이 생각난다. 썰어진 양파들이 눈썹달 같다. 낙지를 씻는다. 뻑뻑 문대서 낙낙하게 만든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다. 보들보들 탱탱해졌다.



둥그런 양푼을 꺼낸다. 오이와 고추장을 넣고 버무린다. 뻑뻑한 고추장이 오이의 물기를 만나 빨갛게 풀린다. 양파와 낙지를 넣는다. 마늘을 툭툭 다져서 넣는다. 미리 갈아둔 마늘을 쓰지 않는다. 마늘의 아린 맛이 뭉개져 비려지는 것이 싫다. 가볍게 섞는다. 고춧가루 조금과 설탕 약간을 넣는다. 식초도 넣는다. 마지막으로 파를 잘게 채 썰어 넣는다. 모든 재료를 버무린다. 손으로 버무리면서 뭉친 것들을 풀어낸다.



예전에는 이렇게 만들었다.


오늘은 반찬가게에서 오이무침을 사다가 데친 낙지를 섞었다. 이런 잔꾀를 써서 나를 먹여 살리는 나를 칭찬하고 싶다. 사 먹는 반찬은 뭔가 부족하다며 안 먹이는 것보다 낫다. 어쨌든 반찬 하나가 만들어졌다. 밥은 햇반이다. 오래된 햇반을 더 오래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하나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당분간 햇반을 먹어야 한다.



먹고 나니 졸리다. 몸이 낙지처럼 늘어진다. 잠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뻘에 잠기듯 잠에 빠져든다. 낮 동안 떠 있다가 일찍 잠을 자러 가버린 초승달을 따라 깜빡 잠이 든다. 잠 속에서도 자는 꿈을 꾼다. 꿈이 속삭인다. 잘 자니 이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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