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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Dec 27. 2022

흥부자 할머니의 노래자랑

할머니는 귀여운 얼굴로 잘 웃으셨다. 어릴 때 엄마가 예뻐하셨다는 말도 가끔 하셨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신 것 같았다. 기분이 좋을 때면 흥이 나서 노래도 잘하시고 가끔은 로비에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로 시작해서 김수희의 ‘남행열차’로 끝나는 리사이틀도 하셨다.      



할머니는 당뇨가 있어서 새벽마다 공복혈당을 측정해야 했다. 매일 손가락 끝을 가늘고 뾰족한 침에 찔리는 것은 고역이다. 하기 싫은 날은 잠이 덜 깬 어린아이처럼 손가락을 이불속으로 감추며 투정을 부리기도 하셨다. 그럴 때 할머니를 달래는 방법은 노래를 시키는 것.      



작년 이맘때 어느 날 새벽에도 그렇게 할머니를 달랬다.      


"오늘은 어떤 노래 부르실래요? “     


"안혀, 내가 은제 노래하는 거 봤남. 쳇. “     


할머니는 이도령 처음 만난 춘향처럼 앵돌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지난번에 그거 그 노래요, 할머니의 아주 잘 뽑으시잖아요. “     


연변에서 오신 간병사가 이북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다정하게 거든다.


"아니, 내가 은제? 무슨 노래를 했다고 저러남? “     


"그 왜 비 나리는 호남선인가... 하는 그 노래요. 모르세요?"


"에휴,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남? 비 내리는 호 남스 언~ 남해영을 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빗물이 흐르고 하는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며,  앗싸 앗싸 손뼉 치면서 조무사와 간병사가 추임새 넣는다.    

 

 

어르신 목청이 호남선을 출발하는 동안 공복혈당 검사하고, 손뼉 치면서 뱃살 흔드시는 동안 인슐린 주사하고, 할머니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옷 내려 드리고 오늘의 임무를 마치고 병실에서 퇴장했었다.     



할머니는 이제 없다. 한 달 전쯤 많이 아프셨다. 식사를 잘 못하시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더니 졸린 듯이 까무룩 잠을 주무셨다. 혈당 검사용 바늘로 손가락을 콕 찔러도 하기 싫다고 투정도 못 하셨다. 손가락 끝에 맺힌 핏방울이 묽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어느 새벽 숨소리가 안 좋아지셨던 날, 할머니 가슴에 손을 대고 있다가 가만히 할머니 이름을 부르자 살짝 눈을 뜨시더니 힘없이 웃으셨다. 그게 마지막 미소였다.      



지금쯤 할머니는 할머니의 엄마가 보는 앞에서 산토끼 토끼야 노래를 하고 계실 거다. 두 손을 머리에 붙이고 깡충깡충 토끼 흉내를 내는 율동을 하면서. 잘한다, 잘한다, 우리 아기 잘한다, 손뼉 쳐주는 엄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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