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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Jan 25. 2023

춥지만 크림빵은 달콤해


오늘은 무지 춥네요. 이렇게 추우면 어른도 출근하기 싫죠.      


어릴 때부터 추위를 많이 탔어요. 깡말라서 더 그랬을 수도 있고요. 지금은 보름달 빵 같은 폭신한 뱃살이라도 있지만, 그때는 홀쭉하고 야리야리했거든요. 정말이라니까요.   

  

열 살 때 그해 겨울 그날도 무척 추웠어요.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친구랑 재미난 이야기 하면서 가도 한참을 걸리는데 그날따라 친구는 먼저 학교에 가버리고 나 혼자 집을 나섰죠. 고개를 숙이고 터덜터덜 걷는데 바람이 자꾸 가방을 잡아당겨요. ‘가지 마, 가지 마.’하면서요.     


모자를 덮어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장갑을 낀 채로 솜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도 여전히 손은 시렸어요. 운동화 속 발가락은 딱딱해지고요. 코가 시려서 콧등은 빨개지고요. 차고 매운 공기가 콧구멍을 따갑게 하고요. 할 수 없이 입으로 숨을 쉬면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고요. 눈썹까지 축축해져서 정말 학교에 가기 싫었지요.     


서울이지만 시골 같은 외발산동 작은 마을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는 길에는 사방천지 확 뚫린 논둑길이 있었지요. 정말 정말 학교가 가기 싫던 열 살 때 그날,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이 엉겨 있고, 사르륵 얼음판도 보이는 논바닥을 보니 울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늘은 너무 추워서 학교에 갈 수 없다고 집에 가서 울어야지. 그러면 엄마가 나를 가엾이 여기고 하루 쉬라고 할지도 몰라.’     


이런 얕은꾀를 쓰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죠. 엄마는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쳐다봤어요. 나는 싸락눈 한 톨 녹은 것보다 더 작은 눈물방울을 짜내면서 불쌍한 표정과 우는 목소리로 엄마에게 말했죠.     


“너무 추워서 학교에 갈 수가 없어요.”     


엄마는 말없이 나를 쳐다봤어요. 열 살의 나는 학교 안 갔다고 혼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엄마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요.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셨어요. 그리고는 서랍장 속에 있던 지갑을 가져와서 동전 하나를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셨죠. 나는 야단맞을 줄 알고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가 깜짝 놀라서 엄마를 쳐다봤어요.     


“이거 가지고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에서 빵 사 먹어. 니가 좋아하는 크림빵.”     


엄마가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권모술수’를 쓰시는 것을 알았지만, (열 살 어린애라도 딱 느낌이 옵디다.) 나는 그 동전을 받아 들고 학교를 갔어요. 꽝꽝 언 논둑길을 용감하게 탕탕 밟고 갔지요. 씽씽 부는 바람을 씩씩하게 가르면서 날 듯이 갔지요. 여전히 입김은 하얗게 나오고 콧등은 빨갛게 시렸지만 하나도 안 추웠어요.      

순식간에 학교 앞에 도착해서는 크림빵을 샀어요! 찌그러지지 않게 가방에 잘 넣고 학교로 갔죠. 교실에 들어가니 어떤 아이들은 책상 위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고요, 차가운 교실 마룻바닥에서 딱지치기를 하는 한심한 남자애들도 보였어요.      


나는 가방에서 크림빵을 꺼내 뽀시락 소리가 나게 비닐봉지를 뜯었지요. 손으로 한 입 크기로 잘라 입 안에 넣고 먹기 시작했어요. 폭신한 빵을 입 안에서 사르르 녹이면서 하얗고 매끈한 크림을 혀로 느끼면서 천천히 천천히 먹기 시작했죠. 짝이 먹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어요.      


“줄까?”      


짝은 대답은 안 했지만 너무나 간절히 먹고 싶은 표정이었지요. 크림이 보이게 조금 뜯어줬어요. 그날 책상은 나 혼자 썼어요. 짝의 지우개는 내 것이나 다름없었고요.     


공기놀이하던 여자애들도 딱지치기하던 남자아이들도 다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어요. 나는 우아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턱을 치켜들고 내가 주고 싶은 아이들에게만 빵을 한 조각씩 뜯어주는 은혜를 베풀었죠.     


엄마는 알고 있었나 봐요. 동그란 빵 하나로 내가 교실에서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순간을 즐길 거라는 것을요. 그날은 집에 오는 길도 전혀 춥지 않았더랬죠.      


크, 크, 큭, 오늘은 열 살의 크림빵이 생각나는 깡깡 추운 날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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