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초순이면 날이 조금씩 풀린다. 금방이라도 봄이 올 것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얼어있던 땅의 틈 사이로 물기가 스며 나온다. 흙이 녹는다. 햇볕이 잘 드는 쪽을 살펴보면 자잘한 풀잎들이 보인다. 땅에 방울방울 초록을 퍼뜨리고 있다. 마음도 스르륵 봄 쪽으로 기운다.
그러다가 이월 중순이 지나면 바람이 다시 찾아온다. 목도리를 풀어버린 목을 후려 감는 매서운 바람이다. 이마가 선득해지고 코가 맵고 귓바퀴가 얼얼해진다. 게다가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흔든다. 다시 겨울이 온 듯하다. 꽃샘바람이다.
이 무렵 바람이 하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면 봄꽃을 샘내는 바람이라는 ‘꽃샘바람’은 이름이 잘 못 붙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나무를 휘감는다. 나무의 정수리를 두드린다. 넓게 펼쳐진 가지들을 펄럭이게 한다. 내 이마와 코와 귓등을 훑듯이 잔가지 하나하나를 훑어낸다. 내 목을 오싹하게 했듯 굵은 줄기를 긴장하게 한다.
바람 덕분에 나무에 남아있던 겨울의 흔적이 떨어진다. 가을에서 겨울 동안 가지 끝을 붙잡고 가랑가랑 흔들리던 마른 잎들이 나무와 헤어져 철새처럼 떼를 지어 우수수 날아오른다. 나무를 떠난다. 떠난 잎들이 나무의 발치를 붙잡지 못하게 바람이 멀리 데리고 간다.
이 시기에 꽃샘바람이 없었다면 나무는 겨울의 그늘을 얼룩덜룩 묻힌 채 봄을 맞았으리라.
바람의 수고로 우듬지에 온전히 햇볕이 앉는다. 빈 가지 사이사이로 햇살이 스민다. 굵은 둥치에 햇빛이 감긴다. 겨우내 얼었던 나무의 발등이 녹으면서 근질거린다. 뿌리가 기지개를 켜면서 땅속으로 길게 새 뿌리를 뻗는다.
알고 보면 봄이 오는 길을 터주는 것이 꽃샘바람이다. 꽃이 피어날 자리를 깨끗하게 비워두는 것이 꽃샘바람이다. 그러니 꽃샘바람이란 말은 틀렸다. 꽃맞이 바람이다. 봄 마중 바람이다.
나도 저 바람의 힘을 빌려 겨울 끝자락에 만났던 얼룩을 털어버려야겠다. 털어낼 것, 다 털어내고 가벼워져야겠다. 그리고 바람 뒤에 오는 볕과 빛으로 기지개를 켜야겠다. 바람이 터준 길로 봄을 맞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