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앞에 차를 세우고 조수석에 놓인 상자를 꺼냈다. 몸을 돌려 우체국 문을 보는 순간, 오늘이 공휴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이 택배 상자를 다시 차에 싣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디로 갈까. 멍하게 바라본 계기판에 연료가 없다고 빨간불이 들어와 있다. 내일 서울 가려면 기름을 넣어야겠다. 차를 돌려 자유로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주유소로 향했다. 차에 연료가 가득해지니 어딘가 가고싶어진다. 부앙 엑셀을 밟고 싶어진다.
멀리 가기는 부담스럽고 마침 커피콩 떨어진게 생각나서 헤이리로 커피를 사러 갔다. 제 2자유로에 들어서자 마자 빗방울이 떨어진다. 처음에는 빗방울이 앞 유리창에 작은 점으로 붙었다. 비가 점점 거세지더니 검은 아스팔트 위로 빗방울이 튕겨 올라오는 것이 보일 정도로 쏟아졌다. 날씨운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리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비가 잦아들었다. 커피콩을 사고 다시 차를 타려는는 새의 배설물이 조수석 유리창에 철푸덕 떨어진다. 비로 젖은 유리를 타고 줄줄 흐른다. 순식간에 조수석 손잡이까지 흘러내렸다. 어른 손바닥 두 개 넓이다. 휴지로 닦아낼 수 없을 정도다. 재수 없는 새란 놈!
새를 욕하다가 세차한지 오래 되었으니 이 기회에 실내세차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번 갔던 세차장이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줘서 그 곳으로 갔다. 세차장 입구 문은 닫혀있고 이전 표지판이 붙어 있다. 오늘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차장 사장님께 전화를 걸어 주소를 물어 이전한 곳으로 갔다. 차를 맡겨놓고 주변을 둘러보니 오래된 시골의 주택들이 보이고 텃밭도 보였다. 하지만 집들은 가꾸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당에는 풀이 가득했고 대문은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어 있었다.
그래도 꽃이 넘치는 계절이라 풀들 사이로 금계국도 보이고 초롱꽃도 보였다. 비 온 뒤의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동네 구경을 하는데 담장에 빨간 줄장미가 넘실거리는 집이 보였다. 그 집은 마당에 잔디도 깔끔하게 깎여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대문 위에 아치형의 구조물이 얹혀져 있었고 거기에도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마치 비밀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다른 집과 달리 대문은 열려있었다. 마당에는 흰색 테이블과 의자도 보였다. 작은 연못도 있었다.
"뭐 해? 들어 와."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아무도 없다. 분명 사람 목소리였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장미 담장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서야 간판이 보였다.
'선녀보살의 시크릿 가든'
점집인가보다 생각하며 다시 들여다보니 대문 너머 마당 지나 왼편에 자리 잡은 집이 보였다. 마당 쪽으로 커다란 샷시 유리문이 있었지만, 안이 어두워서 집 안은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처마에 달린 풍경만이 작은 소리로 마당과 집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사주나 점을 잘 믿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지 않는다기보다는 나쁜 미래를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런 곳은 가본 적이 거의 없다. 십 년 전 엄마 생신날 친정에 형제들이 모였을 때 언니가 엄마 집 근처에 용한 점쟁이가 있어서 거기 예약을 했다고 식사를 마치고 가볼 거라고 했다. 그때 언니를 따라서 가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가서도 나는 쭈볏거리고 앉아있었다. 뭘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물어본다는 것이 오히려 내 비밀을 털어놓는 것 같았다. 미리 알게 될 나쁜 일에 계속 신경이 쓰이게 되는 것도 싫었다. 그 때는 미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딩... 디잉...’
옛일을 생각하다 풍경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세차장으로 가려고 발을 돌리는데 발목에 무언가가 재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바람보다 강하고 시원한 무엇이 순간적으로 찰싹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느낌.
“에웅.”
고양이였다. 온몸이 하얀 털로 뒤덮인 고양이 한 마리가 물고기 모양의 풍경 아래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 눈은 파란색이고 오른쪽 눈은 분홍색이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가자 고양이는 일어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나도 고양이를 따라 걸었다.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
아까 들었던 목소리였다. 나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선녀 보살의 집 바로 앞이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고 방충망 문은 닫혀 있었다. 소리는 분명 집 안에서 났다. 희미하게 집 안이 보였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집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커다란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오니? 뭘 그렇게 망설여?”
갑자기 방충망으로 된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나는 가느다란 철사로 엮인 방충망 틈으로 집 안에 앉아있는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문이 열려 화들짝 놀랐다. 귀신이 문을 열었나.
문이 열리자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향해 어서 들어오라고 손을 까딱거렸다. 나는 홀린 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다시 문이 스르르르 닫혔다. 목덜미가 서늘하고 머리털이 쭈뼛 서면서 다리가 후들 떨렸다.
“에웅.”
고양이다. 소파에 사람은 없고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온몸의 털이 하얗고 한쪽 눈은 파랗고 다른 쪽 눈은 분홍색인 것을 보니 아까 풍경 아래 앉아있던 그 고양이가 분명하다. 어라, 저 녀석은 언제 들어온 거지. 분명 아까 나보다 앞서서 걷다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현관문은 닫혀 있었잖아. 소파에 앉아있던 사람은 어디 간 거지.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혹시 이 집은 죽은 길고양이들의 혼이 사는 곳인가. 그럴지도 몰라. 어쩐지 이 동네 분위기가 좀 스산했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마당을 가꾼 집도 없고 잡초만 무성하고. 아무래도 나가야겠어.
“얘,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들어가자. 신당에 왔으면 선녀님께 인사드려야지.”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를 잡는다. 그러나 그 손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내 등을 감은 팔은 천정에 붉은 연등이 잔뜩 걸린 방으로 나를 슬쩍 밀었다. 나는 마치 이상한 꿈에 걸린 것처럼 팔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거기 앉아."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좌탁 앞에 앉았다. 적갈색의 옷칠이 된 나무로 된 상이었다. 어릴 적 이런 상에서 밥을 먹은 기억이 났다. 상 위에는 쌀이 수북하게 담기 놋그릇도 있었고 작은 방울이 여러 개 달린 막대도 있었고 오방색 깃발을 감아 둔 것도 있었다.
"신당에서는 모자는 벗어야지."
나는 얼른 모자를 벗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릎까지 꿇고 앉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이거."
그녀는 얼른 무릎을 꿇고 앉는 나를 보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내게 '선녀보살'이라고 써진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나는 명함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가방에 넣었다.
"아니, 가방에 넣으라는 게 아니고, 거기 이름 밑에 숫자, 거기로 넣으면 돼."
"뭘요? 아! 얼마 입금하나요?"
나는 그녀가 불러주는 금액을 명함 밑에 쓰여 있는 계좌로 입금했다. 나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계좌를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기에서 띵 똥 소리가 났다. 입금을 확인한 그녀가 말했다.
“자, 이름부터 불러 봐. 생년월일하고.”
“이름은 최희정, 한자 알려드려야 하죠? 생일은 0000년 8월 11일이요. 음력. 시는 정확히 오전 아홉 시 전인지 후인지 모르겠어요.”
“한자 필요 없어. 시는 몰라도 돼. 뭐가 궁금해? 선녀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뭐야?”
우연히 길 가다가 들어온 것이라 나는 딱히 궁금한 게 없었다. 속 답답한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점집까지 찾아 미래를 묻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들어와 복채까지 냈으니 미래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좋은 일 있어요? 나쁜 일은 말하지 마세요.”
난 미리 다가올 일 중에 좋은 일만 알려달라고 했다. 나쁜 일은 아는 순간부터 신경이 쓰일 게 뻔하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공책에 내 이름과 생일을 적고 손가락 마디를 짚어가면서 뭔가 생각하더니
“올해는 다 갔어. 유월이니 올해 운수는 끝났다고 봐야지. 내년이 대박이네. 이거, 이름 가운데 ‘희’자랑 태어난 달 팔월, 요 두 개가 내년 아주 끝내주는 운을 데려오겠어.”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왜 너는 너를 평가하고 있니?”
“네? 제가 뭘......”
“넌 그냥 써. 쓰고 엮어. 그리고 세상으로 던져. 잘 썼는지 못 썼는지 평가는 받아든 사람들이 하는 거야. 너는 애가 소심해서 니가 쓴 걸 니가 평가를 하고 있느라고 오는 운을 놓치잖아.”
나는 눈이 커졌다. 다시 무릎을 꿇을 뻔했다. 동네 아줌마들 점심에 국수 삶아 먹고 둘러앉아 마른 오징어 씹으며 화투패 돌리던 모습으로 대충 한 다리는 가부좌를 하고 다른 한 다리는 세우고 앉았던 자세를 가다듬어 고쳐 앉았다. 내가 글이랍시고 끄적거리는 것을 저 여자는 어찌 안 것인가? 나는 얼른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라고 내 직업을 말했다.
“그건 밥벌이고. 솔직히 글 써서 책 낸다고 그게 돈이 된는 건 아니잖어. 그래도 니 재주가 그건데 해봐야지. 망설이지 말고.”
“솔직히 난 내가 잘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근데 재주가 있는데 왜 나는 막 하고 싶다 하는 맘이 안 생길까요?”
나는 어느새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조신한, 그러나 점점 쪼그라드는 목소리가 되었다.
“게을러! 게을러서 그래. 욕심도 읎꼬. 남 눈치보지 말고 막 덤벼. 내년에는 운이 좋으니까 올해 열심히 모아. 쓴 거 다 꺼내서 모아. 그리고 엮어서 여기저기 다 뿌려. 가만히 앉았지만 말고. 저, 저, 저 또 쪼그라드는 얼굴이다. 용기를 내라, 좀. 아휴 답답해.”
나는 괜히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렇지 그걸 물어봐야겠다.
“그건 그렇고요, 궁금한 게 생겼어요. 알고 싶은 거 있어요.”
나는 교실에서 선생님께 질문하는 학생처럼 오른손을 번쩍 쳐들면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는 내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대답했다.
“없어!”
“네? 뭐, 가, 요?”
“남자 없다고!!! 글이나 써. 부지런히!!!!!!!”
갑자기 복채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이이잉’ 내 전화기가 울렸다. 세차장에서 세차가 끝났으니 차를 찾으러 오라는 전화였다.
세차장으로 돌아오면서 뭔가 허전했다. 허무했다. 세차장 사장님은 차가 너무 지저분하고 실내에 곰팡이가 있어서 오염도에 따른 추가 요금을 내라고 한다. 달라는 돈을 주고 차를 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기운이 빠진다. 뭔가 홀린 듯 이상야릇한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피곤했다. 배도 고팠다.
“용기를 내라, 좀.”
선녀 보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용기라...... 수납장을 뒤졌다. ‘용기’에 들어있는 즉석 밥을 찾아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깻잎이랑 멸치볶음이랑 냉장고에 묵혀 둔 밑반찬을 꺼내 밥을 먹었다. 다 먹었는데도 이유 없이 허기가 몰려온다. 귓가에 그녀의 말이 맴돈다.
“없어! 남자 없다고!! 글이나 써!!!”
아아, 나는 첩첩산중 절간 장미였던가. 저녁엔 이런 된장찌개를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