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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Nov 06. 2023

가을비는 추우적(秋雨滴)




새벽부터 비 내렸어요. 가을이라 추우추우(秋雨秋雨) 내려요. 낙엽 한 잎 떨어지고 찬비 한 방울 떨어지고 다시 낙엽 한 잎 떨어지고 그 위에 찬비 한 방울 또 떨어져요. 추적추적(秋滴秋滴) 쌓여요. 봄에는 비록 비는 아래로 내리지만 꽃도 잎도 위로 솟아오르는 계절이지요. 하지만 가을은 비도 아래도 잎도 아래로 켜켜이 쌓여 모두 함께 적적해지는 계절이에요. 어깨가 처지기 쉽고 고개도 수그러들기 쉽죠. 혼자 견디면 각자 쓸쓸해져요. 쓸쓸함을 분해하면 슬슬과 슬슬이 되죠. 조반 대신 모닝커피를 한 종지 들이켜고 슬슬 애인 사냥을 떠나요.


오늘의 애인은 나보다 젊어요. 내 옆자리 조수석에 앉아 냉커피를 쪽쪽 빨면서 자기는 아직 사십 대라고 자랑해요. 자유로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을까 하다가 참았어요. 너만 젊어 봤냐 나도 젊어 봤다는 가사의 노래가 생각나요. 속으로만 불러요. 울 아빠가 예전에 자주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요. 사십 대도 노안 오고 무르팍 시릴 날이 불원장래(不遠將來)랍니다. 흥!!


시리고 외로운 나의 무르팍을 달래주고 싶어요. 뜨거운 손길이 필요하지만 없어요. 대신 뜨거운 도가니탕을 먹기로 해요. 삼청동으로 가요. 맑은 국물의 진짜 도가니탕을 먹어요. 후식으로는 단팥죽을 먹어요. 부영 도가니탕 먹고 두 번째로 잘하는 집 단팥죽을 먹었으면 삼청동에서 먹을 건 다 먹은 거예요. 흡족하게 배를 쓰다듬으면서 골목 산책을 해요. 담장 밖으로 여름내 고운 빛을 자랑했던 수국이 낙엽 송이로 고개를 떨구고 있어요. 젊은 애인은 이런 색의 수국은 처음 본다고 감탄해요. 에혀, 가르칠 것이 많아요.


다 먹고 드라이브를 해요. 삼청공원을 지나고 삼청각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 길을 달려요. 비에 젖은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요. 팔각정으로 올라가요. 커다란 소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솔향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요. 탁 트인 시야가 눈을 맑게 해요. 멀리 산머리에 구름이 얹혀 있는 풍경으로 기념사진을 찰칵 찍어요. 내 머리 위에 구름 얹은 기분이 들어요. 진분홍 철쭉꽃이 몇 송이 피어있어요. 봄 아니라도 피고 싶으면 피는 거죠. 철없다 흉볼 필요는 없어요. 다시 산길을 돌아 내려와요.


헤어지기 전에 집 근처 카페에 가요. 커피와 달콤한 과자를 먹어요. 카페 앞 작은 공원의 나무들도 추우추우(秋雨秋雨) 내리는 비를 맞고 있어요. 낙엽 한 잎 떨어지고 찬비 한 방울 떨어지고 다시 낙엽 한 잎 떨어지고 그 위에 찬비 한 방울 또 떨어져요. 추적추적(秋滴秋滴) 쌓여요. 눈앞에 가을을 두고 멀리 갔다가 왔어요. 하지만 결국 돌아올 길이지만 가끔은 멀리 가 보는 것도 괜찮아요.


집에 돌아와 까무룩 졸다 일어났어요. 비는 여전히 추우적추우적(秋雨滴秋雨滴) 내리고 있어요. 창문을 여니 물기 가득한 바람이 들어와요. 이마가 서늘해져요. 빗방울이 툭 치자 은행잎 하나가 노랗게 자지러지면서 흑흑 떨어져요. 가을이 젖어 들고 있어요. 코끝이 시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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