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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Feb 04. 2024

내 사랑 도넛

오늘 만난 애인은 기운이 없어 보여요. 이가 안 좋아서 치과 치료를 받는대요. 우리 나이에 다 그렇죠. 하지만 애들도 치과 치료는 받아요. 어른들은 인생의 달콤함을 탐하다가 이가 삭아 치료를 받고 아이들은 순수하게 사탕을 탐하다가 이가 썩어 치료를 받죠.     


내일의 애인에게서 카톡이 와요. 갑자기 엄마가 응급실에 가셔서 약속을 취소해야 한대요. 엄마를 보살피는 일이 당연히 먼저라고, 내일 약속이 미뤄진다고 우리 연애 전선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보내요.    

 

어떤 애인은 어머니가 허리를 다쳐 보름 넘게 입원 중이시고 다른 애인의 엄마는 팔을 다쳐서 오래 입원하셨다가 이제 막 퇴원하셨어요. 우리 엄마도 재작년에 꽃밭에서 쿵 주저앉아 척추 압박골절이 와서 여름내 입원하셨어요. 꼼짝 못 하고 누워 계셨죠.      


이제는 나도 나의 애인들도 흔히 기저질환이라고 하는 병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요. 당뇨라든지 고혈압이라든지, 그중 흔한 것은 예전에 고지혈증이라고 부르던 이상지질혈증이죠. 암에 걸려 수술과 항암을 하는 경우도 있고요. 갑자기 안부 대신 부고가 오기도 해요. 걱정과 근심이 늘어나요. 우울과 한숨도 늘고요.     


나는 원래 어릴 때부터 소심하고 걱정으로 내 인생 축을 돌릴 정도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노인 요양병원에서 일하면서 여러 죽음을 마주하고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내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호스피스 센터에서 급격하게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욱 생각이 변했어요.  

    

오늘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의 나를 사랑하자. 여기 나와 함께 하는 애인들을 양껏 사랑해주자. 말로는 자이언티처럼 양화대교를 바라보면서 행복하자 사랑하자 하기는 쉽지만, 막상 실천은 어려워요.     


그래도 전보다 달라진 점은 있어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별로 염려하지 않게 되었어요. 우주의 나쁜 기운 흡수를 잘하는 사람들은 괜히 남 뒤에서 수군거리고 눈 흘기고 손가락질을 하죠.    

  

전 같으면 억울하고 속상해서 울기도 하고 답답해서 끙끙 앓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넌 그래라 그렇게 점점 뻘밭에 빠져라, 난 네가 그러거나 말거나 도도하게 고개 쳐들고 당당하게 오늘에서 내일로 걸어갈 거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친답니다. 아니 그러려고 노력하죠.     


왜냐구요? 내 시간이 아깝거든요. 나도 아깝고요. 내게 나쁜 기운을 얼룩처럼 남기려는 사람들에게 휘둘려서 내가 나를 상처 내고 싶지 않거든요. 나는 내가 이뻐해 줘야지요. 속이 상하면 겉도 상하거든요. 내가 나를 괴롭힐 필요는 없죠.     


그래서 오늘은 오늘의 애인으로 당첨된 애인에게 달콤한 도넛을 먹자고 했어요. 이 애인도 도넛 좋아한대요. 둘이 마주 앉아 가슴에, 아니 뱃살에 도넛 모양을 동글동글 새기며 냠냠 맛있게 먹었어요. 


해장국을 먹고 길을 걷다가 크리스피 도넛 가게를 지날 때 ‘나 저 도넛 좋아해. 뜨거운 커피랑 먹으면 맛있어. 같이 먹을래?’라고 묻는 남자가 있다면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어요. 설탕 시럽 가득 뿌려진 ‘오리지널 글레이즈드 도넛’과 뜨거운 커피를 같이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몽롱한 눈빛으로 주절거리는 내 말을 들은 오늘의 애인께서 내 뱃살을 보며 코웃음을 치면서 한마디 해요.   

  

“그래도 아직 배꼽 쪽은 쏙 들어갔네. 도넛 구멍처럼 말이야. 크크킄”     


빠지직 우정에 금 가는 소리 들려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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