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은 사람을 지우지 못한다

우먼타임스 2022.01.03

by 최희정

눈이다. 광장에 눈 온다. 하얀 점들이 차례 없이 다투듯 쏟아져 내린다. 직선으로 이어져 바닥으로 내리 꽂힌다.



바람이 분다. 흰색의 직선들은 사선이 된다. 사선은 빗금이 되어 서울역의 오래된 건물을 지우고 광장을 지우고 광장을 떠도는 사람을 지운다. 서울역 광장에 얼룩처럼 존재하던 남루를 걸친 사람들을 지운다. 지우고 덮고 하얀 풍경만 남긴다.



그때, 점 하나가 빗금을 뚫고 나온다. 추위에 떨며 지워지던 점에게 다가간다. 두 개의 작고 흐릿한 점이 만나 조금 커다란 하나의 점이 된다. 하나의 점이 또 하나의 다른 점에게 제 몸의 일부를 건네준다. 한 점은 조금 커지고 한 점은 조금 작아졌다. 그러나 이제 눈은 두 개의 점을 지우지 못한다. 두 개의 점이 합쳐져 큰 점이 되었던 순간은 사람들의 눈에 방점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폭설에 떨던 노숙인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입혀주고 옷을 여며주던 사진은 작년 1월 초 어느 신문사 기자에 의해 우연히 포착된 장면이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단절과 격리를 겪던 당시에 사람들은 이 사진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나도 크게 감동했다.



올겨울이 시작될 무렵 지인이 이 사진을 SNS에 다시 올렸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눈이 엄청 많이 내리고 있어서 서울역 광장은 이미 하얗게 변했고 주변 건물이나 사물도 희끄무레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윤곽이 흐릿했다. 세상이 온통 눈에 파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하필 눈이 내린 시간은 다들 출근으로 바쁜 아침이었다. 그 눈을 헤치고 각자 자기 갈 길 바쁜데 한 사람이 길을 멈춰 서서 등이 구부정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숙인에게 외투를 벗어 입혀주고 앞자락을 여며주고 모자를 씌워주고 있었다.



사진을 다시 보니 지난겨울 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이 다시 살아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때를 떠올리며 감동에 젖는 분위기였다. 눈은 사람을 지우지 못했다. 인정(人情)은 오히려 폭설 속에서 또렷하게 방점으로 살아났다.



복잡한 출근 시간 두 대의 자동차가 갓길에 비상등을 켜고 서 있다. 앞차에서 내린 중년의 여성이 뒤차에서 내린 젊은 여성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덥석 젊은 여성의 어깨를 안아준다. 마치 딸을 달래는 모습이다.



지난 11월 늦가을 어느 날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이다. 젊은 여성이 어린아이가 아파 급히 응급실을 가는 중에 앞차와 접촉사고가 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앞차 운전자는 자기 차의 피해를 따지기 전에 뒤차 운전자인 아기 엄마를 먼저 위로해주고 안심시켜 주었다.



뒤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이 장면이 인터넷에 올라와 많은 사람이 보았다. 사람들은 아기 엄마의 다급한 마음에 공감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이 젊은 여성을 딸처럼 안고 위로해주는 중년 여성에게는 뭉클한 감동과 따뜻함을 느꼈다. 이 장면에도 방점이 찍힌다. 출근 시간의 차량정체와 분주함은 사람을 지우지 못했다. 인정(人情)은 오히려 위급함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살아났다.



다정과 선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 기억된다.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처럼 일부러 외우고 시험 보지 않아도 기억한다. 기억을 꺼내 새로운 다정함을 실천하기도 한다. 어제를 기억한 새들이 오늘의 하늘에 날아오른다. 새해 새 아침이다. 동쪽 하늘에 붉은 방점이 떠오른다.



출처 : 우먼타임스(http://www.women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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