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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Apr 03. 2022

오래 걸은 밤

지난가을 밤을 걷다

어젯밤에는 좀 오래 걸었다. 내자동에서 세종문화회관 뒷 길을 거쳐 덕수궁까지 걸었다. 덕수궁을 지나 삼성 본관 쪽으로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이십 대에 그곳에서 버스를 타거나 내리곤 했다. 그곳은 내가 타는 버스의 회차 지점이었다. 예전에 있던 작은 가게는 없어졌다. 보통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가게들은 내부가 아주 작고 조금 무뚝뚝한 주인이 있고 들어가는 입구에 껌이나 사탕 같은 작은 크기의 물건들이 여러 종류 놓여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시내 한 복판에 있으니 더 좁고 더욱 무뚝뚝한 주인이 있었다.




오후 네 시쯤 2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쪽 출구로 올라와 버스를 기다리느라 이곳에 줄을 서 있으면  카세트테이프가 잔뜩 실려있는 리어카에서 노래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중 유난히 임재범의 노래가 자주 나왔었다. 어쩌면 여러 가수의 노래가 나왔지만 유독 임재범의 목소리만 기억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루 종일 화장실 한 번을 못 가고 뛰다시피 근무를 하던 응급실의 긴장감이 퇴근 후에도 목덜미에 뻣뻣하게 남아있던 신규 간호사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심정은 항상 피곤하고 서글펐다. 그렇다고 얼른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다. 달리 갈 곳도 없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갈 곳이 없던  때였다. 그때 흘러나오는 임재범의 목소리는 막막하고 쓸쓸함을 더 크게 해 주었다. 밤늦게 퇴근하는 날 어둠 속에 울려 퍼지던 노래와 가수의 목소리는 덕지덕지 쓸쓸했었다.




어제 그 정류장 앞을 지나다 보니 구멍가게는 없어지고 편의점이 있었다. 커다란 커피숍도 하나 보였다. 버스 정류장은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지하철 역사 안으로 바쁜 걸음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전했다.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하철 역사 계단을 뛰듯이 올라오는 사람들도 여전했다. 항상 노래가 나오던 리어카는 없었다.




울퉁불퉁하고 낡은 보도 블록을 발로 툭툭 차면서 버스를 기다려볼까? 예전처럼 사람들 틈에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면 혹시 노래가 나올까? 노래가 나오면 괜히 서럽고 막막하던 서른 이전의 그 시절도 나올까? 그때는 왜 그리 막막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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