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철쭉꽃 한 가지
아들과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식당 주차장에서 차 시동을 거는데 부릉 시동이 걸리다 말고 꺼졌다. 다시 걸자 한참 후에야 시동이 걸렸다. 곧바로 동네 카센터로 갔다. 사장님께서 진단기를 돌려보시더니 무슨 전달 플러그 장치가 오래되어서 그렇다고 하며 부품을 갈아 끼워 주셨다.
“좀 달리셔야겠는데요. 차가 너무 뻑뻑해요. 심한 건 아니니까 한 30분 정도 달려주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겨우내 집에서 10분 거리 일터만 왔다 갔다 했다. 이것도 날마다가 아니었다. 한 달로 따지면 보름 정도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3월 들어서야 일주일에 한 번 흑석동을 왔다 했다. 왕복 합쳐 한 시간이 조금 넘는다. 움직이는 때보다 서 있는 때가 많다 보니 차도 관절 마디마디가 뻑뻑해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다. 날도 많이 흐린 게 먼 길 떠날 날씨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오기는 찜찜하다. 그래 엄마한테 가자. 겸사겸사 엄마 집으로 출발한다. 자유로 타고 김포대교 건너 개화산 밑에 있는 엄마 집. 겨우 30분도 안 걸리는데 설 지나고 한 번도 못 갔다. 코로나 폭증을 핑계 삼아 두 달 넘게 안부 전화만 했다.
“밥 먹었어? 고등어 구운 거 있는데 밥 먹어.”
두 달 넘게 얼굴도 안 보여주던 매정한 딸이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났는데 엄마는 마치 학교 갔다 온 어린 자식 보듯 밥부터 차려주려 한다. 그 밥을 받아먹는다. 같이 먹으라고 밀어주는 열무 물김치에서 당귀 향이 난다. 언니가 물김치를 담아 나도 갖다주고 엄마도 가져다 드렸다. 바로 그 물김치에 엄마는 마당에서 자란 당귀를 꺾어다가 넣은 것이다. 큭 웃음이 난다. 엄마 집에 온 게 실감 난다.
요즘은 밥을 직접 해서 드신단다. 겨울 되기 전에는 햇반을 드셨다, 요양보호사님이 오셔서 반찬을 만들어주시니 밥도 부탁하시라 했지만, 자꾸 햇반이 맛이 좋다 하셨다. 딸들은 원래 엄마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딸이라서 엄마가 즉석밥을 드시는 것을 더 참견하지 않았다. 오늘 엄마가 해준 밥을 먹어보니 약간 찰지고 된밥이다. 맞다, 울 엄마는 이런 밥을 좋아했었지. 즉석밥이 엄마가 해 드시던 밥과 식감이 비슷하구나. 엄마는 진밥을 싫어하시지. 혹시 보호사님이 해주시는 밥이 입맛에 안 맞을까 봐 차라리 즉석밥을 드신 거구나. 작년보다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늦되다.
“마당에 꽃구경 가자.”
“날도 흐르고 바람도 풍풍 부는데 그냥 집에 계시지 뭘 나가셔.”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설거지를 하자마자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신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나도 겉옷을 입고 따라나선다. 엄마 뒤에서 걷는 뒤태를 본다. 허리가 조금 펴졌다. 무릎도 그렇네. 걸음도 조금 가벼워지셨다. 밥심인지 꽃심인지 어쨌든 엄마의 허리와 무릎에 빳빳한 심지가 생겼다.
꽃밭이 작년보다 휑하다. 작년 여름에 두 달 병원 입원하고 와보니 없어진 게 많더란다. 겨울에도 혹시나 추위에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고 그게 코로나로 이어질까 봐, 꽁꽁 집에만 있고 마당에 나가지 않았더니 누가 파간 꽃나무가 많단다. 예전 같으면 자식 잃어버린 것처럼 애통해하시고 화도 내셨을 텐데 “얘, 조기 있던 수국, 하늘색 그 큰 걸 누가 파갔더라” 덤덤하게 말씀하신다. 그 담담함을 듣는 나는 속이 일렁거린다.
“둥굴레가 나란히 나란히 이쁘게 피었네.”
“둥굴레 아래 은방울꽃 핀 것도 봐라.”
“아유, 명자꽃이 붉게도 피었네”
“그거 명자 아니야. 장수매야. 땅에 딱 붙어서 피지만 이쁘지.”
“그럼 이게 명자꽃인가 봐. 엄청 붉은색이네.”
“그건 홍천주야. 아주 검붉은 색이지. 작년보다 꽃 많이 달렸어, 명자꽃은 저거.”
내 눈은 엄마의 손끝을 따라다니느라 바쁘다. 꽃 이름 하나 제대로 모르는 나를 비웃으며 바람이 낄낄 분다. 꽃나무들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허리를 비튼다. 엄마는 신났다. 한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한 손으로 엄나무 순이며 방풍나물을 뜯어서 내 손에 쥐여 주신다. 한껏 구부러진 허리가 불안해 보인다. 혹시라도 엄마가 비틀거리실까 걱정이 된다. 얼른 잡아드릴 요량으로 엄마의 등에 손을 얹는다.
스르르 마음이 편해진다. 부드러워진다. 늙은 어미의 등에 손을 얹었을 뿐인데, 온몸 마디마디에 굳어있던 뻑뻑함이 사라진다. ‘엄마…’ 속으로 가만히 불러본다. 눈물 한 방울 뚝 떨어진다. 겨우내 마르고 따갑던 속이 촉촉해진다. 눈앞이 개운해진다.
엄마가 흰 철쭉 한 다발을 꺾어 내민다. 맑아진 눈 속에 얼룩 없이 하얀 꽃을 온전히 하얗게 담는다, 내 차가 출발할 때까지 엄마는 커다란 철쭉나무를 잡고 나를 배웅한다.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 소지품을 넣는 곳에 철쭉꽃 몇 가지로 따라온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