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걷고, 걸어서
‘얼마나 동동거리면서 돌아다녔는지 점심도 못 먹었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열두 살 무렵 엄마는 복덕방 아줌마였다. 요즘에는 오랫동안 공부를 하고 공인 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하는 일이지만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그때는 복덕방이라고 하는 작은 가게에 나이 드신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이 몇 명 앉아있던 업종이었다. 아니면 동네 사정을 잘 알던 쌀가게 같은 곳에서 겸업으로 하기도 했었다.
"느그 큰언니는 고등학교에 막 들어갔지. 작은 언니는 중학생이지, 그 아래로 너, 니 남동생, 거기다가 막내 걔가 겨우 다섯 살인데, 참 먹고 살 일이 막막하더라. 하다못해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물건 들여놓을 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수중에 돈이 없는 거야. 이리 궁리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시작한 일이 복덕방이야. 그건 작은 가게 하나 얻어서 책상 하나 들여놓고 소파랑 의자 몇 개 탁자 정도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거든. 니 아빠가 한문도 잘 알고 서류 꾸미는 것은 잘했잖아."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빠가 허리를 심하게 다치고 병원에 여러 달 입원하셨다. 그 일로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게 되셨다. 먹고사는 일이 다급해진 엄마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복덕방을 차리게 되었다고 한다. 집을 구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주로 엄마가 했지만 가게는 아빠 이름이었다.
"주로 집을 보여주러 다니는 건 내가 했지. 니네 아빠 그 성격에 사람 상대 못 해. 방 하나짜리 월세나 보증금 적은 전세 구하는 사람들 형편은 뻔한데, 그 돈 가지고 어떻게 집을 구하려고 하냐며 면박을 줘서 손님이 화를 내고 나가버리기도 했어. 그래 놓고 괜히 나한테 짜증이나 내고. 그러니 손님 상대하는 일은 내가 했지."
혼자만의 이치와 사리를 내세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던 아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열몇 살이 되어서 소리 지르는 아빠를 피해 안채로 들어와 물 한 사발을 마시며 한숨을 쉬던 엄마 뒷모습을 본다. 물그릇을 내려놓고 마당으로 나와 가게를 한 번 기웃 들여다보고 옥상으로 올라가신다. 그곳에는 엄마의 꽃들이 있다. 엄마는 쪼그리고 앉아 꽃에 물도 주고 시든 이파리도 따준다. 얼굴이 편안해진 엄마가 좁다란 옥상 계단을 다시 내려오신다.
"그때는 집을 보여주러 걸어서 다녔잖니. 좀 먼 곳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온종일 걷는 게 일이었지. 여름에는 얼마나 덥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지 하루에도 옷을 몇 번씩 갈아입었어. “
여름방학, 안방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보는데 ‘아이고 덥다’ 소리를 뱉으시며 엄마가 들어오신다. 딸깍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고 바람 앞에 앉으신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커다란 남성용 손수건으로 목과 턱 밑의 땀을 훔쳐낸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연신 부채질을 하신다. 엄마의 몸에서 후끈한 한여름 땡볕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벌떡 일어나 시원한 물이라도 한잔 떠다 드릴걸. 40여 년이 지나 이제야 생각이 돋는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철이 늦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인 쉰 살 무렵에는 동네 산으로 새벽마다 등산하러 다니기도 하고 집 근처 체육관으로 수영을 배우러 다니기도 하셨다. 그렇게 활동적이었던 분인데 무릎은 일찍 망가졌다. 팔십 대 중반인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은 무릎 주사를 맞으셔야 겨우 거동을 하신다. 재작년의 지팡이가 작년부터는 바퀴와 의자가 달린 보행 보조기로 바뀌었다.
"내가 열여섯 살 때였을 거야. 서울 사촌 언니 집에를 놀러 갔는데 일요일 아침에 갑자기 난리가 터진 거지. 언니가 나 혼자 강원도 집까지 가는 건 위험하니 같이 피난을 가야 한다는 거야. 난 어렸으니 언니 말을 들었어. 그때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모른다. 어딘지 기억은 안 나지만 기차가 다니는 굴이 있었어. 전쟁 통에 기차는 안 다니고 피난 가는 사람들이 그 굴을 걸어 지나갔지. 어찌나 길고 캄캄한지 바로 앞에 가는 사람 등이 안 보일 정도였지."
엄마는 어릴 때부터 많이 걸어야 했구나. 전쟁 속에 집을 찾아 식구들을 찾아 서울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원주로 걸어야 했다. 결혼 후 가장의 사업이 망하고는 호랑이 같은 자식들을 등에 얹고 떨어질세라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먹고살 방도를 찾아내기 위해 과일을 이고 걸었고 참기름이며 들기름병을 이고 다니기도 했다. 그 후에는 복덕방 아줌마로 몇십 년을 걸었다. 막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엄마는 너무 많이 걸었다. 철없던 딸자식은 이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말하다 울게 될까 봐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겠다. 고맙다는 말도 못 하겠다. 괜찮은 척 명랑한 척 걷는 생을 살아오신 엄마가 팔순을 넘기시더니 눈가가 자주 붉어지신다. 괜히 엄마를 울게 하고 싶지 않다. 같이 엉엉 울고 싶지도 않다. 하여 여전히 철없는 척한다. 그저 굽은 허리로 보행 보조기에 몸을 의지에 걷는 엄마보다 한 걸음 뒤에서 느리게 걸을 뿐이다. 엄마에게 절대로 빨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조급해질까 봐 엄마 앞에 걷지도 않는다. 늦된 딸은 그것밖에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