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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Jun 23. 2022

여름엔 역시 소면이지




장마가 시작이다. 날이 무척 흐리다. 같은 도시의 저쪽 끝에서는 벌써 비가 온단다. 나 사는 곳은 아직 구름만 잔뜩이다. 국수를 삶기 위해 물을 끓일 때처럼 뜨겁고 습한 물기가 가득한 구름.


이런 날 저 일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루에 퍼질러 앉아 차가운 국물에 적신 국수를 같이 먹는 것도 괜찮겠다. 설거지해 줄 사람 있으면 국수는 내가 끓일 것이다. 마음이 바뀌면 점심에 열무국수를 해 먹어야지.


"여름엔 역시 소면이지" 일본 영화 '어느 가족'에 나오는 대사이다. 습기가 처덕처덕 느껴지는 장면, 비스듬히 마주 앉아 국수를 먹는 두 사람의 맨살, 어깨에, 팔뚝에, 허벅지에, 허벅지에 닿은 마룻바닥의 끈적끈적함이 화면을 보는 내게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유쾌하지 않게 달라붙는 끈적함 앞에 간단한 밥상이 놓여있다. 국수가 있고 간장이 있다. 그게 전부이다. 두 사람이 비스듬히 마주 앉아 국수를 먹는다. (다음 장면은... 생략) 이 영화를 본 후로는 여름에 국수를 먹을 때 그 장면이 생각난다.


팔팔 끓는 물에 국수를 넣어 삶는다. 국수를  건져 찬물에 헹군다. 더글더글 끓는 세상을 소낙비가 씻어내듯 끓는 물에서 건진 국수를 찬물에 쏴아 씻어낸다. 끈끈함이 씻겨 내려간다. 매끈해진다. 특별한 맛이 섞이지 않은 매끈함과 시원함이 매력인 여름 소면을 먹는다. 나는 오늘 점심에 먹었다. 나는 혼자 먹었다. (젠장...)


노란 지단을 가늘게 채 썰고 죽순을 넣고 대파를 넣었다. 야채가 없어서 배달음식에 따라온 쌈무와 백김치를 채 썰어 넣었다. 이렇게 저렇게 국수 한 사발을 차려 앉는데 후둑후둑 굵은 비가 나뭇잎을 치는 소리가 난다. 국수를 한 젓갈 후루룩 들이키고는 우물우물 씹으면서 창 밖을 본다. 빗방울에 맞은 흙냄새가 땅바닥에서 튕겨 올라온다. 우릉우릉 천둥이 친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빗소리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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