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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Dec 11. 2018

그럼에도 8월을 꿈꾸며

그때는 나의 가지에도 봄을 맞아 새순들이 예쁘게 돋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뜨거운 계절이 있었다. 주머니는 적당히 두둑했고 햇살은 알맞게 뜨거웠다. 좋아하는 것도 좋아할 수 있는 것도 많았던 8월. 나의 열정은 가지마다 한껏 푸르렀다. 그런 나에게도 9월은 왔다. 밤이 되면 머릿속에 시린 바람이 꽉 들어찼다. 이제 와서 이 길이 아니라니. 그 한마디 질문에 그 많던 열정은 금세 낙엽처럼 붉어져 떨어지고 메말랐으며, 아무렇게나 빗자루에 쓸려 버려졌다. 별 수 없었다. 나는 몇 개 남은 잎사귀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준비도, 각오도 없이 사회에서 도망쳤다.


 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더 빼앗길 것은 없다고 믿었건만, 이번엔 불안함이 문을 두드렸다. 그는 나에게 좋아하던 것들을 내놓으라 말했다. 이봐요. 그것마저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대답했다. 무책임하게 도망친 어른은 무엇을 좋아할 자격이 없다고. 만약 그것들을 내주지 않는다면, 떠나지 않겠다고 겁박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가 원하는 걸 건네주었다. 그의 말이 다 맞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매일 새벽 다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일상은 비워졌다. 가끔은 퇴근길에 와인과 치즈를 사 와 영화를 보며 기분을 내는 것과, 백화점을 거닐며 옷을 구경하다 배가 고파지면 자주 가는 국숫집에 들어가 잔치국수를 한 그릇 해치우고 다시 쇼핑에 몰입하던 것과, 전자제품 매장 안에서 수많은 제품들을 만져보며 앞으로 구매할 순서를 정하는 일과, 피곤한 주말 냉장고 속의 반찬을 두고 대충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과, 지나던 길에 숯불갈비 냄새를 맡고는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갈비를 먹자며, 아들이 사는 거라며 거드름을 피우는 것과. 예쁜 우주복을 보고 친조카가 입은 모습을 떠올리며 웃는 것과, 절친한 친구와 마주 앉아한 상 가득 차려진 회를 즐기며 미래를 토론하는 것과 같은 일상을 선택할 권한이 이제 나에게는 없다. 


 이제는 추운 겨울이 가까워 온다. 허름한 주머니를 뒤적이면 아직 남은 잎사귀가 잡힌다. 나는 그것들을 매만지며 다시 8월을 꿈꾼다. 마른 나뭇가지에 서리가 빼곡히 앉으면, 그 대신 좋아하던 일 몇 개쯤은 되찾을 수 있기를. 그렇게만 된다면, 제법 사람 사는 것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따뜻한 계절이 돌아오면,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방문을 열고 나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느릿느릿 커피를 내리고, 빛이 쏟아지는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눈이 녹는 모양을 감상할 것이다. 그때는 나의 가지에도 봄을 맞아 새순들이 예쁘게 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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