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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Nov 07. 2018

제한시간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체력장을 했다. 학생들의 체력을 측정하는 행사였는데 일종의 운동회처럼 느껴져 날짜가 다가오면 기대가 되고 신이 났다. 


종목은 대부분 마음에 들었다. 단거리 달리기도 좋고, 제자리멀리뛰기도 좋았는데, 오래달리기는 좋지 않았다. 심폐 지구력이 저질인 나에겐 지옥과 같은 일이었다. 운동장을 8바퀴 돌아야 했었는데, 시작 후 10분이 지나면 선생님은 호루라기를 불었다. 측정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였다. 10분은 기록을 측정하는 의미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가 울리기 전에 결승선을 통과해 본 기억은 없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올 때면 10분을 줘도 완주를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백수가 된 후로는 주로 책상에 앉아서 불안함을 지우는 일을 했다.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성공한 사람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자기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룬 사람 목소리를 들으며 인생의 방향에 대한 답을 찾았다.


영상을 쭉 보고 나면 열정이 자극 되는 동시에 역효과도 있었다. 다 앞서 달리는 사람 뿐이었으니까.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도 벌써 차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억울했다. 왜 항상 앞서가는 이의 등만 쳐다보아야 하는가. 그래도 내가 가진게 하나쯤은 있겠지. 없다.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없다. 무엇 하나도 이룬게 없었다. 나는 그냥 서른 줄에 직장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었다. 후회가 뒷덜미를 세게 감싸쥔다. 왜 버티지 못했을까, 내가 뭐가 특별하다고. 남들 다 그러고 사는데, 이런 체력으로 뭘 하겠다고.

멀리서 측정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다. 그 당시 체육선생님이 다가와 귀에 속삭인다. 그만해도 돼, 10분을 넘겼어. 더 이상 측정하는 의미가 없단다.


마우스가 바빠진다. 그만해도 된다니요. 모니터를 다시 노려본다. 당장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컴퓨터 앞에서 내려올 수 없었다. 아직은 조금이나마 제한시간이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시간의 바짓가랑이를 꽉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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