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19)
광야 방랑기(민수기)
*목적(...) 셋째, 선민의 최종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임을 가르쳐 준다.
가나안이라는 지역명이 새벽의 만나처럼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가슴에 맺힌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난 지점에서 부조리를 배우고 자유와 혼돈의 광야를 지나 끝내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회유성 어류, 회귀성 류머티즘처럼 아마도 우리들은 영원히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광야에서 무한한 자유와 사랑, 창조의 정신을 발견했을지라도... 거기서의 경험은 또 다른 현실과의 대립, 또 다른 죄의식으로부터 다시금 절망의 땅을 밟게 한다. 그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모세의 규정들은 필연이나 그 속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만 같다.
이 몸 하나 파악하고 다스리는 것은 민족을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때문에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 느껴봤다면 누구라도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가능한 피하고 싶은 사명이어야 할 것이다. 나 하나조차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많은 백성들을 한 길로 움직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저질러. 하면서 배우고 고쳐 나가. 끝내 한 사람 교훈을 얻기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 속에 죽어나간다. 진정한 나를 깨닫고 진실한 삶을 살기까지 이토록 쓰라린 과오를 거듭해야만 하는 걸까. 모세는 이제와 모든 백성이 자신과 같은 예언자가 되길 바라며 여호와께서 성령을 주시길 원한다고 말한다. 이 어리석은 역사가 누구에게나 무수히 반복된다. 그리고 반복의 지점마다 기적으로 보이는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빛이 있으라는 순간처럼 매우 짧고도 강렬하다. 그로부터 새우주가 시작된다. 그 광야에 접어든 사람들은 앞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번개가 머리를 쪼개고 감긴 눈이 뜨이고 가슴이 열리는, 모든 것을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성경이 가까이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이라 표현한 것이지 그 어떤 고정된 진리로 일컫고 싶지는 않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어느 정도 결속 되었다 판단했는지 슬슬 다른 민족과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 백성들을 셈한다. 살아남기 위해, 기름진 땅을 빼앗아 성소를 안착시키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뜻을 앞세워 안에서 밖으로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부조리한 세포들에게 정녕 다른 방향은 없는 걸까. 이 무렵 '나실인'이라는 독립적인 신분이 처음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로 먹고 마시는 데 제약이 있고 머리카락도 함부로 자르지 못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수도사들이 떠올랐다.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야곱의 후손이지만 모세의 지파인 레위만은 징집에서 제외된다. 같은 핏줄이라도 자신과 좀 더 가깝고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분담시키는 한편 정신을 단단히 구축하고 확장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줄기와 잎이 전쟁으로 잘려나가도 뿌리만 무사하다면 재건할 수 있으니까. 모세들을 제외한 나머지 열한 지파는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전쟁에 앞장서게 될 것이다. 그런데 확장은 또 다른 가능성이므로 모세의 레위들은 몸의 불평불만으로부터 또 다른 정신체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레위의 일부는 반역하며 정신의 근원인 모세는 하나님께 스스로 죽음을 청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