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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탓

by 자진유리




야밤에 양치하다 말고 괜한 이야기 하나 한다.


내가 종종 무엇을 구태여 포착해 탓하는 이유를 내가 모르지 않는다.


과거 탓이오, 미래 탓이오, 세상 탓이오, 네 탓이오, 내 탓이오,...

내키는 대로 탓하는 이유는 내사(introjection)와 투사(projection) 너머에 있다.


빤하지만 중요한 얘기다.


탓하는 모든 게 실로 나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모든 게 나, 동시에 우리 뜻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뜻이 전혀 아니라는 말은 아니고.


너를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마음.

내 생각대로 안 되면 화를 내거나 좌절하는 모습.

저 양반도 분명 사람인데 어쩐지 나와는 달라 보이는 듯한 착각.

이 밖에도 특정 대상, 현상과 마주하면서 느껴지는 모든 생각감정.


우리(지금이순간모든것)가 애초에 하나가 아니었다면 그런 반응이 본능처럼 튀어나올 리가 없어야 한다.

우리라는 말의 근처도 태어날 수 없이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서로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본능처럼 알고 있을 터이기 때문에.


대충 떠올려봐도 움직이고 관리해야 할 것이 이렇게나 많고 다양하지 않았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신화처럼 뜻대로 되었다.

그러나 비만해진 뒤로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으므로 그 의식, 정신조차 진화처럼 설계하여 전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혼돈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오늘날 이 모습의 내가 여기 있다.

전수 과정의 필연적인 변수이자 윤활유 한 방울로써 불완전해진 인간 하나가 다리를 접고 앉아있다.

테이블 위로 보이는 화분이 있고, 보이지 않는 공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고, 그것을 공기청정기가 거르는 둥 마는 둥 알 수 없는 소리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본체가 확장된 만큼 모든 나들은 따라서 마음과 의식도 함께 확장되어야 하는데, 확장된 상태로 활짝 열려야 하는데, 열려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진세상을 통째로 사랑해야 하는데 이에 무지한 이들은 도리어 축소되고 어리석어진다. 그로부터 드러나는 대표적인 상태가 미움이다. 미움으로부터 탐욕을 비롯한 모든 전장의 깃발이 휘날린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열린 마음도 마음처럼 오래가지는 못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어느덧 나라는 세상은 인간의 몸 안팎으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어리석음을 통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그렇다면 이 시대의 사랑의 규모는 얼마가 적당한 것인가.

이 인간은 대체 얼마나 열려 있어야 살 만한가.

결국 분화된 몸처럼, 가정처럼, 국경처럼 마땅한 선을 그어야 하겠는가.

아니라 해도 누구나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는 기적은 또 가능한가.

선을 그으면 지워지고 나를 지우면 우리가 적힌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영적 스승들일지라도 늘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도 고작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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