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 난리를 피우고서 신상이 멀끔해지자 집구석에 숨어 있던 액(厄)이 튀어나오면서 심술을 부린 건지 아니면 역시나 식물에 손댈 때 좀 더 조심했어야 했는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손에 힘이 빠지며 그만 노트북 모서리로 휴대폰 액정화면을 찍어 버렸다 꽈직. 개운하게 양치를 마치고 오늘도 별일 없는 하루가 될 줄 알았지―만 꽈직, 손목 좀 아픈 게 이런 꼴로 이어진다고? 난생처음 휴대폰도 잃어버리더니 오늘날엔 기어이 니 얼굴을 내 손으로 직접 아작내는구나. 야, 정신 좀 차려 봐라. 얼굴 좀 보여 봐라. 니 얼굴에 왜 내 얼굴만 갈라져 비치니. 정신 좀 차려봐라 응? 정신 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모고또 엇따. 체념하고 잠이나 잘 자야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유심칩도 바꾸고 모처럼 조금 멀리 외출도... 얼마나 편리해.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야. 바람대로 되든 안 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장을 볼 수 있다고.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그런데 이놈은 이렇게 덜렁대고 부주의한 캐릭터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때는 그걸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새로워. 재미가 있어. 나이 드는. 느슨해지는. 뜻하지 않은 지출이 생겨서 가슴이 아프지만 민생쿠폰이 위안을 주네. 이런 고마울 때가.
잠자리에 눕자 덜컥 휴대폰 분실 당시의 트라우마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래도 그때보다야 백번 낫다. 내가 움직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최악이어 봐야 수많은 사진과 일부 데이터 손실. 괜찮다. 내게 8월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시험에 든 것뿐이다. 이제 정신 좀 차리라는 계시이니 괜찮다. 모두 괜찮아. 인생 참. 뇌가 고생이 많아. 그러니 나라도 씩씩하게.
—이 메모는 약 이년 전 지금보다 정신이 맑았을 때의 집중력과 집요함, 하느님의 보우하심으로 아주 먼 파출소에서 되찾은 행운의 아이폰으로 작성되었으므로 내일은 나에게 행운이 따를 것이다.
동네가 낯설다. 나보다 나이 많은 갈빗집이 없어지고 원룸 같은 게 또 우뚝 세워졌다. 원룸은 지독하게 지독한 녀석이다. 보고 있으면 그 자식이 떠오를 만큼 지독하다. 갈빗집이 없어지면 갈빗집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유심칩은 행운의 아이폰으로 무사히 옮겨졌다. 아직도 분실 폰으로 등록되어 있던 바람에 시간이 좀 더 걸렸다. 휴대폰을 분실했을 당시에 쌀쌀맞았던 기억이 있어서 불필요한 긴장이 필요했는데 일련의 사태 때문인지 이번엔 몹시도 친절했다. 뒤 오는 어르신들에게도 친절해서 그제야 나도 경계를 풀었다. 삶은 정말 피곤하다. 남의 가게 들어앉아 있는 것만으로 피곤해.
젠장 마을버스 좌석마다 USB 충전포트가 달려버린 시대다.
에스컬레이터가 깊다. 넘나리 깊어서 발을 헛디딜 것 같다. 어디까지 내려가나. 어지럽다. 그간 문명에게 얼마나 토라졌길래 이모양일까.
애플스토어 직원이 고객만큼 많다. 인종도 여럿이고 시각장애인도 모두와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일하고 있다. 그가 이동할 때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뽑아 든 스마트한 지팡이를 땅으로 촤라락 펼치는 일련의 과정이 이곳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작살난 휴대폰을 맡기고 대기 테이블에 앉아 조는 척을 하면서 기도했다. 제발 내 데이터 좀 살려주십쇼. 나는 죽어도 좋지만 데이터는 좀 봐주십쇼. 야동은 없지만 구름 사진이 많단 말입니다. 요즘 격렬한 날씨만큼이나 구름도 얼마나 휘황찬란한지 모릅니다. 그 사진들요, 요즘 맛 들인 하이쿠를 위한 사진들이란 말이에요. 아씨, 또 뭐가 들어있었는지 모르겠으니까 일단 살려만 주시면...
별게 다 콤팩트하다. 내가 알던 소변기가 아니다. 보다 작고 깊어졌다. 조준이 편안하고 심신이 안정되는 곡률이다. 틀림없이 내가 모르는 기하학이 쓰였다. 집에 갖다 놓고 싶다.
열두 걸음마다 달라지는 향기. 눈이 멀어도 뭘 파는 가게인지 맞출 수 있을 듯. 종이, 의류, 명품, 토탈, 액세서리... 눈에 넣어 꽃가루를 옮기는 분주한 사람들. 어떡하지 전부 가짜 같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말이야, 이상하지 나는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나는 모른다는 것이.
저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저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게 맞나. 요지경아. 시건방지게 네놈은 어떻게 살 것이냐 캐묻는 만화영화를 얼마 전에 봤더랬다. 이제 또다시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
하이야... 격하게 팔꿈치를 찧었다. 이럴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액운이 아직 남아 있나 보다. 내일은 온 집안에 인센스라도 피워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