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춥다 싶을 때, 엎어진 탁상 온습도시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보면 거진은 11쩜 6또다. 이만해도 아무 문제 없이 지낼 만한 걸 보면 현대인의 정신이, 몸과 맘이 얼마나 엉터린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다만 수돗물 수온은 차가움을 넘어 손가락이 불타도록 아파서 세수랑 특히 설거지는 쉬엄쉬엄 해야 한다). 보일러라든지 에어컨이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편으로 내가 점점 왜 이런가 했더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할머니가 꼭 이랬다. 절대로 보일러를 트는 법이 없었다(일주일에 한 번 꼭 목욕탕은 가심—그마저도 다음날 교회 가야 하니까). 실내등도 잘 켜지 않았다. 요리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빠는 아빠의 엄마집에 가면 제일 먼저 보일러 가동 버튼을 때려 누르면서 목청껏 화를 내는 게 인사였다. 아빠가 화를 내는 게 할머니 귀가 멀어서인지 아빠가 원래 그런 사람인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 역시도 그때에는 고집스런 할머니가 잘 이해되지 않았고 늙으면 그냥 다 그렇게 되나 보다 했는데 이제금 그렇게 되는 게 무엇인지 차츰 선명해진다. 할머니가 된 할머니의 모습은 인생의 겨울을 맞은 고독한 여인의 적막한 풍경이 아니라 가장 빛나고 슬기로운 진실이었다. 할머니는 보일러(유혹) 따위 없이도 사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고 하늘이 어두워지면 욕심을 내려놓고 똑같이 눈 감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맛보다 있는 그대로의 생명을 감사하며 천천히 섭취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진리의 사도였고 누구보다 인간다운 여자였다. 식물과 밭일을 좋아하는.
아침 누운자리에서; 또 눈을 떴네 누가 자꾸 버튼을 누르늠 걸까 부팅하는 과정의 언어들을 남깁니다 아프도록 시린 공기와 아침부터 야단법석인 배달 오토바이 배기음 속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하소서 때론 바퀴 같고 모기와 같은 파멸의 기계가 내 몸을 달릴 수 없게 하시고 차고 뾰족한 공기가 내 마음을 얼어붙지 못하게 하소서(...)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한판 돌렸더니 이제는 육쩜 구도다. 그래도 자켓 하나 걸쳤다고 등판이 후끈후끈하다. 6쩜 9도면 활동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온도다. 다만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현대인은 대체로 활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6쩜 9도에 벌벌 떠는 것이다. 남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바꾸라는 진부한 말처럼 온도 역시 진부하게 보일러 따위로 외부를 고칠 게 아니라 몸과 맘이 환경에 굴복하지 않도록 그것을 뜨겁게 또는 차갑게 만드는 법부터 익히고 실천하는 게 더 멋있지 않을까. 빌어먹을 사계절을 또 한 번 맨몸으로 얻어맞으며 또한 멍처럼 드는 생각은 이 땅은 너무 춥고 또 너무 더워. 가까워질 생각은 없고 나날이 멀어지기만 한다. 서로 양보한 듯한 기분 좋은 봄날씨는 며칠 되지도 않지. 그래서인지 이 질긴 족속이 못살겠다고 자꾸 뭘 만드는 걸 보면, 또 그것이 머지않아 다시금 우리들을 더욱 못살게 굴면, 멀어질 수밖에 더 있나. 너와 내가 가만있어도. 인간이란 어리석든 힘이 없든 누구나가 서로의 앞선 생각으로 인해 수탈당하고 죽임 당하는 운명이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못살겠으면 못살겠다고 적는 거면 충분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