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기도 해서 엊저녁에 부시리(히라스)를 사다 먹었다. 부시리는 방어랑 똑같이 생겼지만 맛이 덜해 싼 취급을 받는다. 겨울이면 방어지 부시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처럼 부시리를 고집하는 사람도 얼마 없으려니 매년 챙겨 먹기가 쉽지 않은데 올해도 맛보게 되어 감사할 따름이다. 방어에게 느낄 수 없는 감칠맛이 부시리에게 있다. 그것은 ~가시리 가시리 잇고~ 같은 오래고도 정겨운 맛이다.
제철음식. 철마다 특정 음식이 당기는 것에 한편으로 나도 별수 없이 아저씨가 되었나 싶어 기분이 착잡해지면서도, 내가 꼬마일 적 바라봤던 '아저씨'의 느낌에 비비기에는 아직 먼 것 같다. 불쑥 그 시절의 아저씨 보다 지금아저씨가 고생이 덜하기 때문일까라는 의문에 대해서 시대 형편적으로나 통계적으로 함부로 비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식사의 질이 나아져 싶은가 하면 전혀 그렇질 못하다. 가공식품은 일상식이되었고 기업에서는 매 시즌 인스턴트 바리에이션이 난무한 신제품들이 출시된다. 때문에 월화수목금토일 돌아가며 새로운 맛을 좇는 시커먼 혀가 된 기분이랄지.
현대인은 별수 없이 먹는 행위에 있어서 에너지 확보가 별로 고려되지 않고 자극(속력 포함)이 우선된다. 밥 차려 먹을 시간도 없어 힘도 없어, 오늘은 너무 스트레스받았어, 오늘은 축구 결승전 하는 날이니까, 따위로부터 치킨은 베스트프렌드가 된다. 거짓으로 부푼 음식으로 포만감과 안정감을 느끼는 꼴이다. 가능한 젊을 때 그 면면과 관계를 스스로 확인하고, 그래서 그것들이 평생 내 소중한 삶을 지배해 왔다는 깊은 빡침으로 세상에 반항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텔레비전에서는 큰 병을 치르고 나야 겨우 식단이 바뀌는 사람들이나 보여준다. 그러니 부디 생각해 보세요, 잘 좀 챙겨 먹으세요 잔소리하려는 건 아니고 그저 치킨 브랜드가 너무 많고 그것이 또 터무니없이 비싼 음식이 됐다는 것이 착잡하단 얘기다. 어떻게든 맥일려고 기를 쓰고 양념 치는 세상. 내가 왜 치킨 먹고 싶다랑 싸워야 되나.
나는 신선한 식재료로 건강하게 조리된 음식을 최고로 친다. 맛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삶이 제모습을 찾으며 새삼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그렇다. 애초에 우리가 먹어왔던 것들은 맛이란 게 대단치 않은 것이고 그래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원래 그만큼만 먹어야 되는 거라고 몸이 말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오래 씹는 것이 본성이고 그제야 비로소 자연의 감칠맛을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식사는 본래 그렇게 하는 것인데 뭐 하겠다고 실체도 없는 것에 좇기며 영양가 없이 해독도 잘 안 되는, 그래서 몸과 마음을 곪아 터지게 하는 것들을 내내 먹어왔는지.
창밖에는 온통 그런 것들로 부풀고 있는 듯하다. 본질을 덮거나 뛰어넘기 위해 세상은 정말이지 대단한 노력들을 한다. 그것은 무슨무슨주의를 비롯해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회 현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정신 못 차리면 영영 그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으며 갈수록 두터워지는 그 굴레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거다. 오―그래, 50원짜리 불량식품 까먹던 시절. 내가 삼은 아저씨의 기준은 삐삐 문방구 주인아저씨의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 무엇적으로 확고한 아저씨가 아니라고 우겨봤자 지나가는 꼬마를 붙잡고 물어보면 나는 빼박 아저씨로 밖에 불릴 수 없는 처지다. 이 아저씨는 봄에는 도다리 쑥국, 가을에는 사과대추, 겨울에는 부시리를 먹는단다. 쑥국은 직장 점심시간에 익힌 오랜 전통으로써 여지껏 맥을 잇고 있지. 아쉽게도 그 식당은 치킨집으로 바뀌어 버려서 봄이면 도다리 쑥국 전문점을 찾아다녀야만 한단다. 직접 해먹을 수도 있지만 도다리 쑥국만큼은 식당에서 먹는 게 전통이야. 그 맛을 내려면 주변이 넥타이 맨 아저씨들로 북적북적해야 하거든. 사과대추는 가을이면 사과가 비싸져서 먹기 시작했단다. 나는 대추가 이리도 맛있는 열매인 줄도 모르고 죽을 뻔했지. 먹어 봐. 심지어 김치양념에 버무려 먹어도 맛있단다. 그동안 너를 대추나무사랑걸렸네의 주름진 열매로 오해해서 미안하구나.
이 아저씨는 이제 술 없이도 회를 먹을 수 있는 기인이 됐지만 부시리를 앞에 두니 술 생각이 나 청하 한 병을 깠다. 나는 떠오르는 장면들을 좀 더 오래 기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술 한 병으로 족하다. 이제 철이 다해 말라 말라가는 몸이니, 그동안 술을 물처럼 마시고 살았으니 같은 한탄처럼 슬슬 그럴만한 나이지 하려는데 아니었다. 나는 아직 철이 다한 게 아니었다.
술을 많이 마실 수 있고 또 아무리 마셔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은 복잡계에서 번뇌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 번뇌가 잠잠해질 때까지 술을 부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그것의 존재가 또렷해진다. 나를 잔잔히, 고요하게 만들면 신기한 체험들을 할 수 있다. 도로 귀엽고 천진한 어린아이가 될 수도 있다. 나는 고통, 한계를 시험하고 뛰어넘으려는 짓을 그만뒀다. 내가 원하는 성장은 그것이 줄 수 없구나, 거기에 없구나를 깨달은 뒤다. 그래서 반대로 그것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 열심히, 노력, 최초의 그것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고 알았다. 그는 시스템이었다. 이 아저씨는 어리석어서 너무 오랫동안 속고야 만 것이다. 앞서 나열한 제철음식 역시 시스템으로 인한 것인데 제철음식이란 특정 시기에 먹을 수 있는, 먹어야 하는 음식이 아니다. 너의 계절을, 순간을, 더욱 진하게 실감할 수 있는 음식이 제철음식 아니겠니.
창밖으로 싸리눈이 내린다. 첫눈인가. 한참 멍하니 보고 있으니 불쑥 벽난로가 떠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영화 헤이트풀8에서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산중 대피소에 와있는 듯했다. 난로 위에는 물주전자가 뚜껑을 달그락거리며 김을 뿜고 달콤한 빵냄새도 난다. 남자가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고 책을 읽는다. 평화롭다. 그러나 곧 유혈이 낭자할 것이다.
벽난로. 그 앞에서 엉엉 울며 차가운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내가 보인다. 또 몽유병을 앓은 듯하다. 내 앞에는 시커먼 우주 공간이 펼쳐져 있고 운석 같은 것이 테트리스 조각처럼 끊임없이 나타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나는 그걸 계속 피해야 한다. 더 암담한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징검다리다. 두근. 두근. 발판은 한 걸음 앞에 하나씩만 만들어진다. 그것을 계속 건너며 피해야 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휘청거리며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계속 걸어가고 있을 터였다. 그때 누군가 내 입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숟가락은 따뜻했고 부드러웠고 달콤했다. 크림스프였다. 나는 크림스프를 거품처럼 물고 눈물범벅이 된 채로 걸음을 멈췄다.
음식이 남아 있는 냄비를 설거지하고 물을 올렸다. 냉장고 채소칸에서 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가던 감자 한 덩이와 브로콜리, 당근, 그리고 양파를 꺼내 다듬었다. 분말스프는 무조건 크림스프여야 한다. 양송이나 야채스프는 안 된다. 크림스프여야 어떤 재료를 담아도 작품이 된다. 식빵마저 구우니 비로소 겨울이 완성되었음을 느낀다.
브로콜리는 먹기 번거롭지만 좋아한다. 나무처럼 가지가 많고 프랙탈 구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프에 적셔 한 숟갈 삼켰더니 졸라 뜨겁다. 브로콜리 가지 사이사이에 뜨거운 수프가 걸려 머물기 때문이다.
밥 먹다 말고 노트북을 펼치는 나의 고약한 사고방식은 이토록 뒤죽박죽 지리멸렬한 데다 진지하다. 수프 먹다 데인 혀를 날름거리며 브로콜리 같은 사람이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무성한 만큼 틈도 많은 사람이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뜨거울 수 있고 통풍도 잘되는 사람이길 바라고 있다.
감자나 식빵처럼 폭신해도 좋겠다. 다만 흡수력이 너무 뛰어나 존재가 퍼서석 분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고귀한 희생이자 사랑이다. 비록 더 이상 그의 형태는 볼 수 없으나 그 정신은 수프 안에 녹아 있다. 그런 것들이 수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프를 다 먹고 나니 배가 따땃하다. 눈이 살살 감긴다.
느지막이 태양이 뜬다.
언젠가의 작별도 이런 기분이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