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커피잔을 들고 낮은 나무 테이블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구글시트를 열고 아침일기를 써 내려가다 보면 아랫배에서 구글구글 신호가 온다. 이제 막 앉은 참이지만 싸다 만 똥처럼 일기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진짜 똥을 싸러 가는 시간. 신변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하루에 한 번,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에 행하는 최초이자 거룩한 발걸음이다.
화산을 움켜쥐고 변기에 앉으면 이제 힘을 뺄 때다. 힘을 뺄 때 좋은 작품이 완성되는 것처럼 힘들이지 않고 나온 첫 번째 작품이 가장 애틋하다. 밤새 쌓인 꿈의 부산물들이 모조리 한방에 쏟아져 나오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첫 번째 작품이 나온 뒤에는 다음 작품을 위해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한동안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일부가 아직 몸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그것을 마저 출구까지 인도하는 것이 인생의 본게임이다. 그것은 첫 작품처럼 번쩍이는 영감이 없으며 순전히 자신의 감각 운용에 달렸다.
오른손으로 전자담배를 쥐고 입에 대었다 땠다가 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 오른팔은 세면대 끝에 나른하게 걸쳐있다. 휴대폰을 쥔 왼손은 왼쪽 허벅지에 가볍게 얹어 무언가를 계속 찾는 시늉을 한다. 아랫배에게는 오히려 조금 무심해야 하는 것이다. 학급에서 가장 예쁘고 새침한 여자애의 마음을 뺏으려 하듯이 무궁하고도 다정하게.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궁극의 자연스러움을 유지해야 한다.
복식호흡, 아랫배를 꾹 누르고 있기, 손바닥 누르기 등의 민간요법은 작품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센 바람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글이건 사업이건 인생의 사사로운 모든 짓들은 다 똥이다. 오늘도 사람들은 똥을 싸기 위해 집중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집중이라는 파롤은 대개 경직을 낳는다. 똥을 싸는 것은 집중이라기에는 너무나 커다랗고 가벼운 데다 고요한 섬세함을 길게 유지해야 하는 아주 힘든 작업이다. 딱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송곳보다는 풍선에 가깝다. 어쩌면 양 떼를 모는 일과 비슷할까. 어쨌거나 보통 일은 아니다. 아침부터 똥 잘 싸는 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중요한 것은 뭘 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쾌변의 비결은 당연하게도 릴랙스인 것 같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릴랙스가 머리에 자리하면 안 된다. 눈은 떴지만 아직도 꿈을 꾸듯 해야 한다.
무위자연의 원만함을 닮으려는 노력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멋진 일이다. 그런 면에서 똥 싸기는 삶을 관철하기에 아주 좋은 수행법이다.
똥 싸는 순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위험과 고비가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미리 대비할 수 없으며 이론은 좌절감만 불러일으킨다. 연습할 필요도, 앞서 나갈 필요도 없다. 의지는 고속도로의 변비를 만든다. 온종일 찝찝한 기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를 일이다.
거실에서 낫띵벗띠브즈의 경쾌한 음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이 아침을 더욱 생동하게 해 줄 음악이건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거슬린다. 똥이 쏙 들어간달지. 별안간 혼돈에 휩싸인다. 환풍기 팬 소리가 거세지고, 숨을 골라주던 전자담배가 앞으로 몇 모금 안 남았다 진동하고, 휴대폰 스크롤은 갈피를 잃었으며, 눈앞에는 삐뚤게 걸려 있는 수건 하며, 저어기 구석 샴푸통 안에서 턱을 괴고 날 한심하게 쳐다보는 잔 사마리.., 순간을 찢으며 크로노스가 다가오고 있다. 아랫배가 딱딱하게 굳어간다.
똥 싸러 와서 음악을 탓하는 게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에이씨 뛰쳐나가 음악을 교체하거나 꺼버리거나 해서는 곤란하다(여러모로). 문제를 대하는, 해결하려는 이 귀찮고도 더러운 방식이 정말 싫다. 문제를 안 만들면 되잖아. 왜 문제가 일어났는지, 어디서 일어났는지, 왜 그것을 문제 삼는지에 대해 변기에 잠자코 앉아 있는 게 낫다. 모두는 그러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이다.
음악은 잘못이 없다. 그리고 금세 지나간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똥은 가지 말라고 해도 제 갈 길을 간다. 그저 마음이 흐트러졌구나 하고 알아채야 한다. 그리고 돌아와야 한다. 어디로 돌아와야 하나요라고 물으면 곤란하다. 방을 꾸미듯 화분에 물을 주듯 마음 한편을 쭉 가꿔놨어야지.
음악이 되어서 저 변기에 앉아 오도가도 못하는 존재를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는 곤경에 처했고 급기야 엉덩이골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내가 음악이라면 그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저러다 변비 되겠네.'
음악은 배꼽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여기라면 실컷 드럼을 두드려도 좋겠지.
거대한 (초코)소프트아이스크림이 변기 안에 보기 좋게 쌓여 있다. 어떤 날은 너무 근사해서 앨범에 간직하고 싶을 만큼이다. 미야자키하야오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평이 썩 좋지 못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자기 똥을 관람해 봅시다. 똥 싸며 무엇을 보고 듣는지, 그 순간 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는지, 나아가 아침에 무엇을 먹는지, 종일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않는지, 그것들이 눈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영화가 아닌 똥 안에서 찾을 수 있더라는 말입니다.
미야자키하야오 보다 대단하고, 그 대단한 작품을 매일 써 내려가고 있는 자신에 대해 감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결국 똥 싼 다음의 자근자근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사는 거 아닌가. 들뜨지도 슬프지도 않는. 어쩌면 가장 행복에 가까운.
똥을 싼다는 것은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똥 싸는 걸 괜히 '큰 일을 본다'라고 했을까. 정말 신비롭고도 위대한 일이다. 똥만 잘 싸도 잘 사는 것이리라. 그러니 변깃물을 내리며 '오늘도 똥이 잘 만들어져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자. 잘 닦고 잘 말리자. 결과가 어떻든 엉덩이를 토닥이는 것을 잊지 말자.
쓰다 만 아침일기에 한 줄을 추가했다.
오늘을 기분 좋게 만든 것(1): 똥 마려운 기분 좋은 느낌, 삶의 자세 낱낱을 발견, 텅 빈 속의 자유로움, 채움은 잠들게 하지만 비움은 움직이게 한다.
똥을 삶의 척도로 삼으면 어떨까.
그렇다면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