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자진유리



안경 낀 안톤 쉬거가 온몸으로 사랑이(추선수 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엄마의 맞춤 가발을 쓰고 그러고 있는 사진을 보니 웃겨 디지겠다. 엄마도 이제는 그런 아빠가 좋은가 보다. 무언갈 포기한 건지 무엇을 깨달은 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옛날 같았으면 아-씨... 아빠면 좀 아빠답게 근엄한 맛이 있어야지, 우리 아빠는 왜 이렇게 모든 면에서 어설퍼 보이고 애처럼 낭창낭창거리는 사람이냐고, 굳은 표정으로 탐탁지 않아 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머리를 길러보는 중인데 역시 관둬야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당신 아들이고 나를 웃긴 만큼 당신도 조금은 피식하게 해볼게요 하는 중의적 표현이었나. 그래도 가능한 쭉 길러볼 참이다. 언제 또 길러보겠어. 좀 구린 모습도 수용하는 재미에 들려버려서 말이지. 또 의도완 다르게 누군가에게는 희극인이 되어 기쁨을 줄지 모르는 일이다. 비워 놓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것들도 기적의 조건이다. 특별히 개그맨들에게는 복잡한 사연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진을 좀 더 들여다보고 있으니 측은한 마음이 인다. 우리 아빠 소싯적엔 진짜 안정환 테리우스시절만큼 잘 생겼었는데. 거기에 기타도 메고 노래도 잘했으니 엄마를 꼬실 수 있었겠지. 아빠는 음악을 좋아하고 잘했다. 대학가요제에서 상 탔을 정도로. 그런데 왜 그대로 예쁘게 잘 안착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면 나도 유년기엔 어디 하나 빠지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살게 되며 얼굴을 비롯한 모든 게 엉망이 됐겠구나 싶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밖에 없다. 삶의 법대로 살지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법에 따라 생긴 부작용. 그것은 비단 외모뿐만이 아니다. 그래도 회복될 수 있다. 머리스타일이 어쩌건 표정과 눈빛이 변하면 얼굴이 달라진다. 그것은 성형 따위로 고칠 수 없는 범주다. 건강도 그렇다. 수술, 치료보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 그것을 바로 잡지 않으면 병은 언제고 재발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표정과 눈빛(비유이자 상징임)이 달라지려면 더욱 근원적인 것이 달라져야 한다. 달라지는 강렬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 체험을 하고 나면 쓸데없이 고통받은 대가를 보수하느라 거기에 다시 물질과 노력을 쏟아붓는 이중고, 바보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진정으로 잘 사는 게 뭔지 안다면, 또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에는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졌다지만 엄마 머리카락은 척 보기에도 많이 빠져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지 않은 시간에도 스웨터 어깨와 가슴깨에 수북이 내려앉은 머리카락들을 보니 생각처럼 눈물이 나거나 그러진 않았다.


눈물 나는 가족 상봉의 장에도 또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스파크가 튄다. 역시. 아빠는 유하고 엄마는 강하다. 서로는 각자의 선禪에서 완벽주의자다. 나는 엄말 닮아서 종종 말을 거칠게 하는 면이 있고, 또 아빠를 닮아서 그 말을 듣고 '말'을 '말!'로 바꾸는 것도 잘한다. 사주로 보나 뭘로 보나 양극에 있는 엄마아빠는 결국 나의 지평을 넓혀 줬다. 나는 범주가 넓었고 그만큼 혼란스러웠으며 그만큼 나를 찾는 데 오래 걸렸다. 그 모든 게 나이고 인간이고 생명이고 우주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몇 번 죽었다 깨어났는지 모른다.


엄마아빠가 투닥이는 걸 보고 있으니 나는 잠시 또 어린 시절의 두려움이 튀어나왔지만 이제 그 순간마저도 가만 지켜볼 줄 안다. 그것이 지금, 여기, 존재하는 사실이 아님을 안다. 엄마아빠는 아직도 뭔가 잘 안 맞나 보다. 나는 여러 가지를 감히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각자가 터득한 삶의 지혜로, 사고 수습 기술은 발전한 것 같다. 애초에 사고를 안 내는 방법을 나 혼자 연출해서 선보여 볼까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고가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매일 성경을 읽고 아침마다 나에게 성경 구절을 보내면서도 막상 당신의 가슴에 들어 앉히기는 어려운 것이다. 역시 그런 방법으로는 통달하기 어렵다. 관측해서 뭔갈 정의하고, 이해하려 하고, 과학자의 자세로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지 모르나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따져보면 그닥 바람직하질 못하다. 언덕 오르듯 텍스트와 인식으로써 다가가면 안 된다. 지식이건 배움이건 세상살이 그 뭐건간에. 마치 개미가 그래 보이는 것처럼 땀 흘려 열심히 사는 방식을 먼저 취하는 게 아니다.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이미 종착지에 도착한 너그러운 마음으로. 거길 향해 오르려는 사람 손을 잡아주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이미 다 아는 상태에서 다스려야 한다. 그 마음은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이미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




고춧가루 한 봉지.

키위 두 개.

깍두기 조금.


이게 무슨 물고기둘떡다섯개도 아니고 너무 은혜롭다.

이제야 뭔가 '통'하네요.

귤 몇 박스, 뭔가 왕창, 마음은 알겠지만 그런 거는 내가 또다시 뭘 할 생각을 해야 하잖아요. 진짜 작년에는 그 많은 귤 싱크대에 다 털어 넣고 하나하나 씻고 말리느라 혼났다니깐 아빠. 결국 거의 다 썩어서 쓰레기봉투 값이 더 나왔어. 지금이라면 잼이라도 만들어 지인들 나눠줬을텐데 나는 그냥 그게 꼴 보기 싫었단 말이야. 귤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함부로 음식 나눠주기도 어려운 세상이잖아. 일 벌이는 거 노노해.


귤 따야 한다고요? 이제 고모 소유가 된 밭? 고모부도 아빠한테 그렇게 모질게 했다며. 왜 아빠가 나서. 자기네들은 그렇게 해외여행 몇 달이고 놀다 와서 지쳐서 그렇다매. 나는 귤을 따는 건 괜찮은데 컨테이너에 쌓고 이슬 맞지 않게 덮어두었다가 박스에 신문지 깔고 옮겨 넣고 송장 쓰고 실어 나르고 그거 이제 재미없어... 안 할 거야.


인연은 몸과 마음이 직감한다. 그런 면에서 부모와의 인연도 순리대로라면 일찌감치 종결돼야 하는 게 옳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서 우리는 고통받을 뿐이다. 좀 더 일해봐야지, 버텨봐야지, 하는 모든 것들. 그래서 세상을 지옥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지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으려면 신호를 잘 포착해야 한다. 이정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학교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진짜 언어를 배워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걸 알고서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여동생은 일찌감치 집을 나가 얼굴 보기가 어렵다.


종결된 것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너무 나는 이 불효자 같은 마음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다 각자 안에서 다스릴 뿐이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근심만은 덜어드리자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은 있다. 아직 투닥투닥해도 비로소 관계가 점점 나아지는 게 느껴지니 내 속에도 불 때마다 꺼뜨렸던 무언가가 다시금 조금씩 떨려오는 것 같다.


"안 돼도 할 수 없어요. 꼭 그러지 않아도 아빠 바람대로 살게 될 거고. 나도 아빠가 편히 눈 감았으면 좋겠어. 어쨌거나 그럼 일단 좀 오래 살아 보세요."


아빠는, 잘 봐라 손주 놈 볼 때까지 기어이 살아남고야말겠다고 했다. 예 예.


나는 내 안에 나도 있고 자식도 있고 손주도 있다. 그걸 굳이 실체화해서 뭔갈 배울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서도 꼬마아이를 보면 절로 미소 지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애기가 예뻐 보이면 결혼할 때라고 했는데 그래서 난 애기들 모일 만한 곳에 잘 안 가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이르다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가지 못하게 막는 거겠지.




"50만 원 줄까?"

"너무 많은데. 괜찮아요. 아직 돈 있어요."

"그럼 10만 원만? 돈이 없으면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왜,"

"없어도 사는 법 연습 중이에요. 근심의 무게 변화 살펴보는 중. 지금은 또 아주 가벼워요. 그리고 없으니까 용돈도 넙죽 받을 줄 아네. 신난다."


엄마는 먼저 현관문을 나섰고 나는 아빠랑 끌어안았다.

엄마는 자기도 안아 달라며, 돌아와 품에 안겼다.

나는 그 언제보다 마음을 다해 엄마를 포옥 안아드렸다.

엄마가 좋아하는 예수님이 되어 엄마 몸속의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정화하는 마음으로.

나는 역사상 기도빨이 무척 좋음에도, 예수라는 사람은 나에 대한 기도는 단 한번도 들어준 적이 없지만, 구분지어 남에 대한 기도는 잘 들어줬다. 이 정도 안았으면 세상 그 어떤 병도 말끔히 나을 것이다.


엄마아빠 냄새가 남아 있는 이른 아침. 나는 커피를 내리려다 가만 자리에 앉는다. 여기저기 엄마가 남기고 간 길고 가느다란 것들이 보인다. 커피드리퍼에서 뭔가 떨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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