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는 핑계

by 자진유리



내들아.

내들님.

고맙습니다.


내 대신 쉴 집을 지어주어 고맙습니다.

내 대신 이불솜을 틀고

내 대신 수확을

내 대신 책을

내 대신 배달을

내 대신 계산을

내 대신 노래를

내 대신 잉태를

내 대신 당직을

내 대신 병구완을

내 대신 숱한 밤들을

내 대신 기쁘고

내 대신 슬퍼서

내 대신 멸시당해 주어 고맙고

내 대신 욕망하고

내 대신 싸워주어서 고맙습니다.


그치만

너무 다투지 말아요.

싸움은 내 속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먼저 끝냅시다.

확실히 이깁시다.

절대 뽑히지 않는 깃발을 꽂고

뿌리를 내립시다.

뽑히고 박히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그 고통이 망울지고 나서야

비로소 몸밖 세상과 싸울 자격이 주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는 거겠죠.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수많은 나들의 합의로 만들어졌다.

나는 팔

나는 다리

나는 혈관

나는 근육

나는 심장

나는 뇌



이게 쉬웠을까.

세포만 해도 10조 개란다.

원만히 합의를 마쳐 별 탈없이 태어난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

투쟁으로 만들어진 사람도 있다.

뺏고 뺏기고

무언가를 잃고

무언가는 불필요하게

무언가는 과도하게

무언가는 부족하게

그래서 취약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라도 온전치 못한 것이리라.


그 습은 태어난 뒤로도 문득문득 존재감을 내비친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시스템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앞서 태어나기까지 과정에서 스스로 선택한 것들이

자신을 이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이 도로 시스템이다.

그 모습이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모양인 건 본질적으로 우리 탓이다.

우리는 지금도 존재하지만 줄곧 존재했다.


누구라도 오늘 당장 예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가는 것이 결국 더 나은 시대로 기여되는 것이다.

비록 내 영혼은 그 시대를 함께 누릴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 내는 무엇을 대신해 볼까요.

접시를 닦을까요.

구름을 잡아당길까요.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거나 해도 되지만,

혹여 그것이 당신들의 수고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도 하지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합니다.

바빠서 못한 생각 내가 대신해 볼게요.

그리고 알게 된 게 있으면 말해줄게요.


사랑한다 말합니다.

그것으로 태어나고 죽습니다.

이만 눕겠습니다.

훈련입니다.



이 마음이 아버지가 말한 ‘기본’일 것이다.

이 당연한 걸 어쩌다 내버리고 살았나.

내가 누군지, 우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결국 감사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친절할 수밖에 없다.


불망어, 불양설, 불악구, 불기어라고 쓴다.

뱉는 대로 자국이 남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마디지만 저 하늘처럼,

매일의 날씨처럼,

다양한 종류의 입자와 파동의 모양으로 침을 뱉어 본다.

거미줄처럼 이야기를 짓는다.

그리고 이야기에 뛰어든다.

그 이야기 속 인물이라면 누가 되어도 괜찮다.

다만 가장 마음에 드는 이야기를 고를 것이고 그 세계의 법대로 살 것이다.

법이 그렇지 않으니 그대로 될 리 없지만 결말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쨌건 웃으며 죽을 수밖에 없다.

예쁘게 웃는 법을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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