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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Mar 22. 2024

안경 없는 20시간 이야기

불안

1.

전반적으로 약간 우왕좌왕 두리번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특히 눈 뜨고 나서라든지 샤워를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나 마치고 나서 그러고 있다. 혼돈. 그 불안한 모습은 안경을 찾고 있는 우스꽝스럽고도 나약한 습의 도래다. 그래봤자 없지롱.


2.

낮은 조도를 좋아해서 실내에서는 인공빛 없이 또는 작게 켜고 지냈지만 좀 더 많은 빛을 원하게 되었다.


3.

다른 존재의 갈망을 또 새삼...

일전에도 그랬지만 단시간에 무언가 많이 해야만 할 때, 아 누가 좀 대신해 줬으면 좋겠다로부터의 깨달음처럼. 누가라는 것이 지금은 전부 기곗덩이다. 청소 하나를 하더라도 사람끼리 하면 더 쉽고 재미있을 텐데. 기계가 돌고 있으면 재미있나.

마찬가지로 안경이란 것이 없으니 또한 사람이 필요하구나 한다.

설거지가 잘 됐는지, 청소가 잘 됐는지, 괜히 나의 믿음을 소리 내어 읽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

비슷한 결핍을 각자가 삼은 신이나 사물에게서 찾으면 세상이 이상해진다.

내 기준에선 이미 지나치게 이상한 세상이고.


4.

갈린 원두를 평소처럼 싱크대에서 후후 불다가 체프가 눈에 들어갔다. 안경에 눈 보호 기능도 있었군. 다음부터는 눈 작게 뜨고 불어야지.


5.

모든 사물에 생동감이 추가되었다.

눈앞에 바짝 가져와야 보이기 때문이다.

치커리를 씻다가 잘 씻어졌나 눈앞으로 꽃다발처럼 쥐어들고 들여다 본다.

한 마리 고등어처럼 펄떡대는 엄청난 생명력의 치커리 ㅗㅜㅑ...


6.

치커리와 양배추는 씻고 다듬어 냉장보관해 두었고 돼지 앞다리살, 대파, 배추, 토마토 등을 먹고 남은 쌀국수 국물에 넣어 먹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었다.

씻고 썰고 물과 식초와 참치액을 더해 간 하고 문제없이 요리를 마쳤다.

좀 어수선한 면은 있지만 나아질 것이다.


7.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가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정도는 기본이어야 인간이다.

현대인은 100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100의 근본인 1부터 99까지를 이해도, 할 줄도 모른다.

떡 대신 손가락을 썰어서 새삼 눈의 감사함을 느꼈다는 교훈은 아쉽게도 얻지 못한다.

그런 교훈을 얻은 사람은 교훈을 얻었으니 다시 안경을 쓸 것이고 머지않아 또 망각할 것이다.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나를 사람들이 좋아하기 쉽지 않겠다는 것도 모르지 않지만 나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좋아해주는 것만으로 차고 넘치니 괜찮다. 전 인류가 날 좋아하든 나홀로 좋아하든 똑같다.


8.

뿌연 시야만큼 속도 답답하다.

세상도 그렇다.

실로 한 뼘 안에 것.

한 치 앞만 선명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주의를 애써 한 뼘 안으로 돌리려는 찰나의 의식마저 불필요하다.


9.

후각이 그새 좋아졌다.

후추의 시작은 사과처럼 청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

전자렌지가 불을 켜고 소리 낸다.

그 안엔 꽁꽁 언 피자가 들어 있다.

그 안에서 피자가 도는지 녹아내리는지 알 수 없다.

평소와 다른 개수의 조각을 넣었기 때문에 3분이면 될지 어떨지 모른다.

알고 싶어서 눈을 렌지 문짝에 바짝 갖다 대면 아홉 살 때 아빠 안경이 탐나서 나도 안경을 쓰고 싶어 지지직거리는 티비화면에 틈마다 몰래 눈을 문지른 바보짓과 같으므로 냄새로 알거나 무언갈 믿어야 한다.


전자파는 신체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

언젠가 통신사 중계기 이야기도 했지만 몸이 잘잘잘잘잘대는 감각이 또렷이 느껴진다.

돌아가는 동안에는 그 앞에서 휴대폰도 오작동 한다.


피자가 덜 됐으면 더하면 되고 과했으면 다음부터 덜하면 된다.

어느덧 들리지 않는, 그것도 한 번에 제대로 못하냐 힐난하는 망자들, 또 내면의 지저귐.

믿음은 전자렌지가 아닌 나에게 있어야 한다.


11.

샤워하고 나와서 당혹스러웠다.

깨끗이 씻었는데도 시야가 뿌옇다.

이 바보.

오늘은 모처럼 소금 푼 탕에 들어가 눈을 씻어야겠다.

콧구멍만 물 밖에 내놓고 있는 짓을 곧잘 해와서 하는 말인데.

잘하면 코로 들이마시고 귀로 내뱉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귀가 아가미의 진화라고 언젠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12.

집안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고 없을 것이다.

다음은 나가본다.

점점 멀리.

점점 높이.

끝내 저 깊은 바닷속마저!

고향으로, 더 고향으로!

집을 지나 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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