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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Apr 03. 2024

걸레의 가르침

사랑


날씨가 어떻든 내일은 청소하기로 마음을 먹고 누웠다.

그런데 곧장 잠들지 않고 쓸데없이 두근두근 대다가 짜파게티를 끓여 먹는 바람에 늦잠을 잤다.

낮에 만들어둔―가지와 시금치, 배추, 대파, 우렁을 넣은―마라빤을 짜파게티에 얹어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는 충동 한 방울 때문이었다.


눈이 떠졌을 때는 이정후가 9회 초에 안타를 쳤다는 소식이 들릴 무렵이었다.

에휴.

귀한 아침 시간이 날아갔음에 조금 울적해진다.

청소는 아침에 해야 제맛인데.


이미 정오라는 사실을 알게 돼버렸지만 짙은 구름들이 고맙게도 시간을 덮어준다.

내가 눈 뜬 시각이 아침이다.

나는 아침을 놓치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깨어 있으면 늘 아침이다.

내가 아침이라면 아침인 줄 알아.


내 머릿속에서, 또 이 집안에서 청소라는 일거리는 공간에 따라 개념도 분리되어 있다.

화장실과 나머지, 또 바닥과 바닥이 아닌 것.

그에 따라 필요한 에너지와 걸리는 시간, 도구도 달라지기 때문에 청소하는 날도 웬만하면 여유롭게 분리한다.

오늘은 화장실이 아닌 나머지, 바닥이 아닌 곳의 먼지를 전부 훔치기로 했다.

규칙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또 안에서부터 밖으로.


그러고는 변기에 앉아 쓸데없는 고민을 한다.

엊그제 모기를 잡기 위해 잠깐 안경을 썼던 게 화근이었다.

'안경을 써야 될 것 같은데...'

'안 쓰고도 꼼꼼히 잘 될까...'

'힘도 더 들 거 같은데...'


그러다 문뜩 아침에 꾼 꿈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 여자가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그 여자를 떠올리거나 여자가 하는 말을 들은 적도 없는데—여자는 몇 없는 내가 경애하는 존재다—그 여자가 느닷없이 우리 집에 와가지고는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나의 면면들에 대해 구석구석 한참을 칭찬해 줬다.

그러고 마지막으로 현관문을 나서며 안경 벗은 맨 얼굴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잘생겼어요? 되물었더니 함박 미소 지으며 손을 내미는 여자.

그렇게 악수만 하고 떠나보냈다.

왜 콱 안아보지 않았을까.


그 여자가 맞다면 맞는 거다.

그 여자가 말한 '안경 벗은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외견을 뜻하는 게 아니다.


변기물을 내린다.



걸레를 적시고 사물들의 온몸을 구석구석 닦는다.

닦이고 있는지 없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예전처럼 몸을 움직여서는 먼지가 보이지 않으므로 무릎을 굽히지 않아도 될 것들에 무릎을 굽혀야 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 것들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경험대로 짐작하고 가까이 다가간다.

가까이 가서는 굽힌다.

그러고 있으니 굽힘은 겸손도 아니오 패배도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때문에 꿇어.

하는 놈들은.

감히 내려다보는 놈들은.

'날 좀 봐줘', '사랑해 줘'라고 말하는 가여운 사람이겠구나.


보이지 않으므로 멀리서 헤아리면 걸레질 또한 평등해진다.

어느 부분만 더 닦이고 덜 닦이고 같은 게 없다.

어디에 먼지가 많고 적든 전부 고르게 된다.


헤아리건 가까이 다가가건 어느덧 좋은 것만 남았구나.  




안 보이면 청소도 더 힘들 줄 알았다.

아니었다.

되레 안경을 거쳐서 본다는 게 큰 스트레스를 일으켜왔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가뿐할 수가.

너무 의외다.

고작 안경이.


두어시간 집중하고도 에너지가 팡팡 남아돈다.

어쩌면 지난밤 먹은 짜파게티 덕분일 수도 있다.

바닥 청소는 내일로 되어 있지만 기운이 넘치기 때문에 예정에 없던 청소기도 돌린다.

청소기를 돌리고 나면 물걸레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경이 없으니 좋은 점이 더 많다.

보름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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