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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온직 Nov 03. 2017

너 태어난 지 1년

2017년 11월 3일 (토) 범준탄생 389일.


11월이다. 범준이는 돌을 넘겼고, 며칠 후면 13개월이 된다. 아이는 물만 뿌려 두면 하룻밤 새에도 성큼 자라나 있던 콩나물처럼 옹글게 자라나고 있다. 젖 살도 많이 빠졌다. 비슷한 개월 수 아기들에 비해 키나 몸무게는 작은 편이고, 신체 발달은 빠른 편이다.  



‘음마~음마~’ 하며 의미 없는 옹알이를 남발할 때 영락없는 아기인데, 어쩔 땐 요구사항을 들어 달라며 눈을 바로 맞추고 제법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 댄다. 속이 꽉 찬 완자같다. 너무 당차 당황스럽다. 9월 8일, 내 생일 저녁에 범준이가 선물처럼 몇 발자국을 걸었고 나는 그 용기가 너무 대견해 울고 말았다. 두 달이 지난 지금은? 우당 탕탕 걷고 박고 뛰고 뒹굴고 난리도 아니다. 괜히 신체 발달이 빠른 게 아니다. 전라도 사투리로 ‘노대다’는 말로 밖에는 범준이를 설명할 수 없다. 요즘 범준이는 정말 한시도 가만 있지 않고 ‘노댄다’.   

 



회사로 복귀한 지 2달이 되었다. 엄마인 나보다 사랑과 정성으로 범준이를 돌봐 주시는 친정 엄마 덕분인지, 회사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며 삶의 만족도는 크게 향상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찾는 사람일수록 육아의 만족도가 크다 던데 나는 그러한 엄마가 못되었던 것 같다. 1년간 전업 주부로 살며, 나는 그 속에서 오로지 범준이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범준이 이유식 세 끼, 분유 세끼 총 여섯 끼를 챙겨 먹이는 와중에 정작 내 밥 한 끼 챙겨 먹을 생각조차 못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아이가 신생아일 때는 아무라도 붙잡고 힘들다고 하소연이라도 했다. 범준이가 6개월 정도가 지나니 내가 힘든 건지, 기쁜 건지, 할 만 한지, 날이 무뎌 진 칼날처럼 ‘나’라는 사람 자체가 두루뭉실해 진 느낌이었다. 해가 저물면 범준이를 재우고, 젖병을 씻고, 티비를 보며 맥주 한 캔을 하고, 그 와중에 외롭다는 생각은 좀 했던 것 같다. 범준이가 예뻐서 행복했다. ‘나’와 마주하는 행복을 찾는 데는 실패 했다.    



사실 이 행복함의 본질이 불분명하다. 사람들과 마주하고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숨통이 트인걸까. 내 능력껏 일하고 보상 받을 수 있다는 성취감 때문일까. 꼭꼭 씹어 양껏 밥을 먹고 커피를 들고 산책을 할 수 있어 행복한 걸까. 뭐든 본질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여하튼 살아있고 깨어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 요즘이다. 긍정적인 것은 일을 다니고 오히려 범준이와의 시간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퇴근길 범준이가 가끔 마중을 나온다. 처음에는 멀리서 달려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알아보고는 배시시 웃고, 유모차에서 몸을 들썩이며 ‘안아 달라’ ‘반갑다’ ‘어디 갔다 왔냐’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난리법석을 떤다. 아기 띠 없이 20분을 그냥 안고 걸어도 그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다. 요즘에는 어른 키로도 닿지 않는 나무, 건물, 꽃 등등을 만지게 해 달라고 몸부림을 쳐 댄다. ‘범준아, 뽀뽀 한번만 해주면 저거 만지게 해줄게.’ 우리는 그 길에만 뽀뽀를 열 번도 넘게 해댄다.    



바쁜 하루 와중 범준이는 내 가슴 속 보석이다. 지친 밤, 너는 내 너른 나무이다. 보금자리이다. 지금은 범준이와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혼란스럽지만, 시간이 지나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무디고, 외로운 와중에도 행복했던 나. 나다운 나. 엄마로의 나. 혼자로의 나. 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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