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 손주부 Nov 26. 2020

운명의 소개팅

아내는 아는 선생님의 소개로 만났다. 선생님께서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만나보라고 권유를 하셨다. 얼마 전 소개팅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일이 있어서 내키지는 않았다. 그래도 강력하게 권유 하셔서 못 이기는 척하며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락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여자 보는 눈이 낮다며 놀림을 많이 당했다. 내 눈에는 예뻐 보이는데, 친구들은 내 뺨을 때리며 정신 좀 차리라고 했다. 그리고, 제발 안경 좀 쓰고 다니라고 했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뺨을 많이 맞은 탓이었을 까 항상 좌우 1.5를 달리던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정말 안경을 쓰고 다니게 되었다. 안경을 쓰고 나서도 친구들에게 눈이 낮다고 많이 맞았던 것을 보면 안경 탓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여성상이 남들과 조금 달랐을 뿐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텔레비전을 통해 강수지 씨를 보고 처음 이성에 대한 감정을 느꼈다. 가냘픈 몸에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보랏빛 향기를 부를 때면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불끈 솟아올랐다. 그래서 였을까, 강수지 씨를 짝사랑하고 난 이후부터 긴 생머리에 몸이 연약하신 분을 보면 가슴이 두근 거렸다.


그런데, 마지막 소개팅 자리에 나오신 분은 강수지 씨가 아니라 강호동 씨였다 (머리가 긴 강호동!!!). 강호동 씨의 외모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켜주고 싶은 여자분과 사귀고 싶었을 뿐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자신도 못 생긴 주제에 여자 외모를 봤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그분께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긴 생머리의 강호동 씨 앞에 놓여있던 전화기가 울리는 것이 아닌가! 설마 저분이 소개팅녀 일까 했는데, 역시나 그분이 전화를 받으신다. 그 자리에서 바로 카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하필 강호동 씨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서로 인사를 한다.  


“어머 안녕하세요, 강호숙(가명)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손주부라고 합니다. 어라, 저랑 입고 있으신 옷이 똑같으시네요?”

“네, 그러게요. 저희들 인연이 있나 봐요. 호호호”


그녀의 웃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매일 두들겨 맞고 살 것 같았다. 어깨가 나보다 넓고 전완근이 나보다 더 멋있는 그녀였다.


그날 소개팅 간다고 큰 맘먹고 백화점에서 빈폴 베이지색 재킷을 샀는데, 소개팅녀는 나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S 사이즈 그녀는 L 사이즈. 그녀의 옷이 커서 그런지 그녀 재킷에 새겨진 자전거 아저씨 상표가 주먹 만해 보였다. 그리고 소개팅 내내 눈에 계속 들어와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소개팅이 끝난 후 주선자를 통해서 여자분이 날 너무 맘에 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옷도 같은 것을 입었다며, 인연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보다 어깨도 더 넓고 얼굴도 더 넓으신 분과 같이 살 자신은 없어서 정중하게 제 타입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소개팅을 하고 난 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강수지 씨처럼 예쁘고 착한 여자분이 소개팅에 나올리는 없겠구나.’


그런 여자분들은 소개팅 자리에 나오지 않더라도 대기 중인 남자들이 한 트럭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롯데월드에 가도 인기 많은 놀이기구는 대기 기간이 길고, 인기 없는 놀이기구는 아무 때나 탈 수 있다. 갑자기 재미없는 놀이기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슬퍼졌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 때 경제학 시간에도 배웠다. 중고차 시장과 소개팅 자리는 전형적인 레몬 시장이라는 것을. 좋은 매물은 중고차 시장까지 안 나오고 친한 지인에게 넘어간다. 예쁘고 착한 여자는 소개팅 자리까지 안 나오고 친한 오빠에게 넘어간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고 난 이후 지갑에 있던 달러와 출장 중 구매 물품에 대한 영수증을 정리하다가 아내의 연락처를 발견했다. 주선자로 부터 연락처를 받은 지 2주일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전화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주말에 할 일 도 없고 소개해주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너무 예쁘다!)

“안녕하세요!!! 연락이 많이 늦었습니다. 손주부라고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예뻤다. 게다가 이름은 더 예뻤다.

당시 유명했던 여자 아이돌의 이름과 같았다. 그녀와 주말에 혜화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강수지 씨가 나올 것만 같아!’




오늘은 K 씨(아내)를 처음 만나는 날이다. 아침부터 긴장을 한 탓인지 피부가 오늘따라 푸석 푸석해 보인다. 피부 미남으로 보이려고 평소에 바르지도 않던 비비크림을 발랐는데 이런 젠장, 얼굴이 너무 하얗게 변해서 강시처럼 되어버렸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첫인상에서 마이너스 백점 맞고 주선자에게 욕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비크림은 그냥 지우고 약속 장소로 헐레벌떡 나갔다.


약속시간인 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그녀가 오기까지 5분이라는 시간이 남았는데, 이 놈의 시간이 지독히도 느리게 갔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 K는 나타나지 않았다. 10분을 기다려도 2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설마, 약속 장소에 나왔다가 내 얼굴 보고 그냥 바로 도망 치신 건가?’


마지막 소개팅 자리에서 강호동 닮은 분을 뵙고 2층 카페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듯이, K씨도 내 얼굴을 보고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그렇게 바람을 맞고 순대국밥이나 먹으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순간,


“손주부 씨 맞으시죠? 늦어서 죄송합니다. K라고 합니다.”


K는 약속 시간에 늦어서 급히 뛰어 온 모양인지 숨을 가쁘게 쉬고 있었다.

긴 생머리에 커다란 눈, 가냘픈 몸의 K 씨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네………. 반갑습니다……..” (우왓, 완전 내 스타일이다!)


추운 겨울날 혜화역 1번 출구 앞에서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어서 짜증이 날만도 했는데, K를 보는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미리 예약해둔 카페로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그 카페에서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개팅 자리에 나가면 대개 하는 지루한 신상조사도 그녀와 하니 신이 났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나 정말 유쾌하게 수다를 떤 기분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K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저 다음 주에 친구들이랑 일본으로 여행 가는데, 혹시 필요한 물건 있으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가 하얘졌다. 평소 해외 출장을 자주 가서 면세점에서 필요한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필요한 물건을 말하면 K가 여행 중에 가끔씩 내 생각을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머리를 쥐어 짜냈다. 그 순간 기내 잡지에서 보았던 비오템 옴므 화장품이 떠올랐다.


“비오템 화장품 좀 부탁드려요”


K는 면세점에서 비오템 옴므 화장품 가격이 너무 비싸서 깜짝 놀랐다. 얼굴은 로션도 안 바르는 시골 청년처럼 생겼는데, 이렇게 비싼 화장품을 쓰는 된장남이라니, 이런 남자랑 계속 만나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 화장품은 10만 원 가까이하던 가격이었는데, 만난 지 일주일 된 소개팅 남자가 예의상 필요한 것 없냐고 물어본 질문에 비싼 화장품을 사달라고 해서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같이 여행을 갔던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을 보니 그분이 널 진지하게 생각하나 보네?”


K는 그 말을 듣고 손주부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본 여행에서 다녀온 K는 화장품과 함께 손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손편지에 감동했다.




K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여자분들과는 좀 많이 달랐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카톡 확인을 하고 바로 답장을 못하면(일명 일씹), EX(전 여자 친구)는 바가지를 긁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화장실 갈 때 답장도 못하냐고 다그쳤다. EX는 내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이 마음에 안 든다면서 본인이 알려주는 방식으로 입으라고 지적했다. EX와 같이 있으면 잘못한 일도 없는데 뭔가 항상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K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회사에서 카톡을 확인하고 바로 연락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과거 EX로부터의 트라우마가 있었던 지라 밤에 K에게 사죄의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황당했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답장을 못 보낼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K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EX 같으면, 손가락이 부러졌냐, 일하는 동안에는 내 생각이 1분도 안났냐 등의 폭풍 잔소리에 시달렸을 텐데 덤덤한 K의 반응에 얼떨떨했다.


게다가 K는 나의 패션 센스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K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참 편했다. 회사에서 힘들게 일하고 난 후 집에서 휴식을 취하듯, K는 마음이 지쳤을 때 쉴 수 있는 집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내가 가진 배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손주부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란 생각이 점점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학원비로 자식들에게 경제적 자유 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