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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Nov 27. 2020

아내에게 돈 아끼면 벌어지는 일

여자 친구 K(아내)와 데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밸런타인데이 때 과도한 선물을 받았다. K는 밸런타인데이 때 밤새워 케이크를 만들고, 케이크 위에 글자도 직접 새겼다. 손으로 직접 쓴 장문의 편지도 준비했다. 그리고, 자기 자취방에 와서 음식도 만들어 주었다. 그때 K의 멘트는 이랬다.


“손주부 씨 우리 집에서 된장찌개 먹고 갈래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K의 멘트는 요즘 유행하는 “라면 먹고 갈래요?”의 원조였던 것 같다. 순진했던 나는 정말 된장만 먹고 나온 것을 지금 후회한다. 그때 처음으로 K가 만든 밥상을 받았다. 화려한 밥상은 아니었지만,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된장찌개에 계란말이, 그리고 갓 지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밑반찬들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된장찌개 덕분에 얼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따뜻한 된장찌개 국물이 내 몸에 들어가자 너무나도 포근하고 행복한 느낌이 차올랐다.


'K와 결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화이트 데이는 다가오는데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케이크를 준비한 것도 아니고 손편지를 쓴 것도 아니고, 괜찮은 레스토랑을 예약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회사 업무가 너무 늦게 끝나서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씻고 바로 잠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회사에서 직원 복지 차원에서 연극표가 2장 나왔다.


“오, 신이 시여! 제게 이렇게 도움을 주시는군요!”


나는 K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화이트 데이 날에 연극을 보러 가자고 말했다. 회사에서 받은 공짜 표인데, 같이 보자고 하기는 조금 미안해서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이거, 정말 재미있는 공연인데, K 씨랑 같이 가려고 힘들게 예매했어요!”


K는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너무나도 신나 했다. 전화를 끊고 손편지를 급하게 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편지를 받았기에, 그에 버금가는 편지를 쓰려니 부담이 되어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인터넷으로 “감동적인 편지”를 검색해서 짜깁기로 써보았다가, 기분이 영 찜찜해서 지웠다. 몇 시간 이를 반복하다가 겨우 한 장을 완성했다.


그렇게 대망의 화이트 데이가 밝아 올랐다. K를 혜화역에서 만나서 손을 잡고 연극 공연장으로 향했다. 10분을 걸어간 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수많은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주부 씨,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손주부, 안녕!”


공연장에 이미 와있던 수많은 회사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옆에 여자 친구분이셔? 둘이 완전 잘 어울린다.”


갑작스러운 인사와 질문세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앗, K에게는 내가 힘들게 예매한 연극 공연이라고 했는데 어떡하지!’


아니나 다를까 눈치 백 단인 K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해있었고, 연극 내내 K로부터 암흑의 기운이 계속 뿜어져 나와 내 가슴을 쑤셔대었다. 연극이 끝나자마자, K에게 이실직고했다.


“K 씨 정말 미안해요. 사실은 연극 공연 표 회사에서 무료로 받았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란 말이 있듯이, 사귀고 처음 맞은 공연을 공짜표로 무마하려는 짠돌이 남자 친구의 행보에 K는 크게 실망하고 먼저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집으로 가겠다는 K의 손목을 잡고 대학로 골목에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지난날의 과보를 받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바뀐 입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요즘 직장일로 바빠진 아내는 더 이상 손편지를 쓰지 않는다. 내가 찡찡되어야 한 장 써준다. 신혼 초 지갑에 꽂혀있던 손편지는 어느 순간 아내가 갖고 싶은 쇼핑 리스트로 바뀌었고 직접 구워주던 케이크는 파리바게트가 대신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즘 둘째 딸아이가 기념일마다 케이크를 만들어준다. 정성은 고마운데, 케이크를 굽는 이유가 "본인 용돈 아끼기 위함"이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딸아이의 말에 '이건 뭐지?'란 기분이 든다.


오히려 요즘엔 집에서 살림 사는 내가 기념일을 더 열심히 챙긴다. 아내의 생일 때 10페이지 분량의 장문 편지를 써서 주기도 하고 생일날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열심히 만든다. 딸아이들과 아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가랜드('생일 축해해' 같은 글씨가 쓰인 장식)로 집을 꾸미고 아내가 집에 들어오면 촛불을 켜고 선물과 함께 생일 축하노래를 부른다.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점점 감수성 풍부한 소녀가 되어가고 아내는 무덤덤한 아저씨가 되어가는 것 같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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