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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Dec 02. 2020

#67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싼 물건을 좋아했다. 항상 아끼면서 사셨던 어머니의 영향 탓도 있겠지만, 정가에 물건을 사면 왠지 손해 본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30% 이상 세일이 들어가야 물건을 샀다. 그리고 일단 산 물건은 또 쉽게 버리지 못했다. 지금 당장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언젠가 다시 쓸 것 같은 생각에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읽지 않고 책장에 꽂혀만 있던 책들도 같은 이유로 쉽게 버리지 못했다. 내가 읽지 않으면, 적어도 나중에 딸아이가 커서 읽을 것만 같아서 버릴 수 없었다. 옷도 그랬다. Old Navy, H&M, Zara 같은 저가 스파 브랜드에서 70% 할인할 때 구매했던 옷들이 오랫동안 쌓이자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우리 집 물건의 양은 2016년 러시아에 주재원으로 있을 때 최고점을 찍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집이 좁아서 물건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었는데,  회사가 구해준 50평대 집에서 살다 보니 물건을 늘려도 수납할 공간이 있었다. 그렇게 맥시멀 리스트로 살다가 2016년 12월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옷가지와 몇 권의 책만 챙겨서 비행기를 타고 미리 구해둔 전셋집으로 들어갔고 러시아에 있던 수많은 짐들은 배를 타고 한 달에 걸쳐 들어왔다.


한 달간 검은색 이민가방 두 개에 들어 있던 짐만으로 우리 가족은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던 옷, 신발, 책, 그릇, 장난감도 모두 없었는데 사는데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왜 그렇게 많은 물건들을 집에 쌓아놓고 살았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민 가방 2개 분량의 짐만 있어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데 말이다.  


러시아에서 짐이 도착하자 옷들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좋아해서 산 옷이라기보다, 색상이나 디자인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70% 할인을 해서 산 옷들이 대부분이었고 이 옷들이 쌓이니 생각보다 내가 옷에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지만 해도 수십 벌이고 셔츠도 수십 벌이었지만 평소에 입는 옷은 맘에 드는 3벌을 돌려서 입고 있었던 것을 알아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옷만 남기고 나머지 옷들은 기부하거나 재활용 수거함에 넣었다. 버리는 순간에는 가슴이 조금 아팠지만, 막상 버리고 나니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옷이 많을 때는 항상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옷의 가짓수가 줄어드니 오히려 코디하기도 수월해졌다. 게다가 어떤 옷들을 가지고 있는지 항상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기에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사거나 충동구매를 하는 일이 없어졌다.  책들도 전자책으로 볼 수 있거나 더 이상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들은 과감하게 처분했다. 알라딘 같은 중고서점에 팔았더니 한 권 당 1,000~5,000원 정도를 쳐주어서 생각보다 쏠쏠했다. 그리고 남은 책들은 주변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딸아이들은 이런 아버지와는 달리 여전히 맥시멀 리스트다. 장난감과 책, 인형은 기본이고 작아져서 입지도 못하는 옷들도 본인이 보관하고 있어야 직성에 풀린다. 딸아이가 어릴 때는 몰래몰래 조금씩 갖다 버렸는데, 이젠 머리가 커져서 어느 날 불쑥 자기 물건이 없어졌다면서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아빠, 여기 있던 손바닥 크기 만한 크리스마스트리 못 봤어?"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작년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트리가 이곳저곳 굴러다니기에 내가 몰래 처분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분명히 여기에 두었는데 말이지... 혹시, 아빠가 버린 거 아니지?"

"어.......... 어......... 어.......... 응, 나도 잘.... 잘 모르겠어......"


이런,,,, 긴장하면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게 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이후 나는 딸아이들의 물건을 바로 버리지 않게 되었다. 대신 베란다에 빈 라면 박스를 준비하고 그곳에 담아 두었다가 몇 개월 동안 딸아이들이 찾지 않으면 야밤에 몰래 나가서 처분하곤 한다. (다행히도 딸아이들은 아빠가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니 여기에 비밀을 털어놓아도 된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인데, 딸아이와 아내가 도와주질 않는다. 아직도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딸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를 지금 작성중인데 벌써 2페이지를 넘어가고 있다. 내가 믿는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는데, 딸아이와 아내도 조만간 깨달음을 얻고 나와 같은 길을 걸어주길 바란다.




"띵동"

"누구세요?"

"택배 왔어요!"


흑, 이번 생애 미니멀리스트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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