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 손주부 Jun 22. 2020

요리보다 보고서 쓰기가 쉬웠어요

살림 초보남 요리학원 다니기

난 무슨 일을 시작하던지 간에 한번 꽂히면 초반에 엄청 달리는 편이다. 다양한 살림살이 중에서도 요리 또한 같은 수순을 밟았다. 요리에 대한 열정이 불타올라서 내 손으로 한식, 중식, 일식을 모두 섭렵하겠다는 의지로 활활 타 올랐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동네 근처에 있는 요리학원을 등록했다. 한식 조리사 자격증 취득반이었다.


한 반에 15명 정도의 수강생이 있고, 선생님의 시범을 보면서 매일 두 가지 요리를 하는 반이었다. 15명의 수강생 가운데 여자분은 14명이었고, 1명이 남자였다. (그게 접니다.) 평일 낮에 40대 초반의 남자가 한식 조리사 자격증 반에 있는 것이 다른 여성분들 눈에는 신기해 보였나 보다.


'백수라느니, 실직자라느니 내게 들릴 목소리로 떠들어 주셨다.'


뒤에 계셨던 넉살 좋아 보이는 50대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남자가 무슨 일로 요리 수업을 듣는가? 식당이라도 차릴라 합니까?"


한국에서는 남자가 요리학원 다니는 것이 많이 이상한가 보다. 내 사생활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귀찮아서 '네'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부터 졸지에 난 식당 창업을 앞둔 동네 아저씨가 되었다.


수강생들의 프로필은 대부분 화려했다. 절반 정도는 요리사로 이미 일하고 계셨고, 나머지 절반은 주부생활 20년 차 이상의 주부들이었다.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취미로 다니시는 분들이었다. 일단 각자 들고 온 칼에서부터 내공이 느껴졌다. 중국요리의 달인인 이연복 셰프님처럼 내 얼굴만 한 크기의 네모난 칼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일식당에서 일하셨는지 한문으로 본인 이름이 크게 쓰인 칼을 가져오신 분도 있었다. 내가 들고 온 칼은 한식 조리사 학원에서 판매하는 눈금이 그려져 있는 중국산 만 원짜리 칼이었는데, 일단 칼에서부터 의문의 일패와 함께 몸이 움츠려 들었다.

 

30대 초반의 여자 선생님이 하얀색 셰프 복을 입고 들어오셨다. 수업은 선생님의 시범과 함께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든 요리의 기본은 마늘 다지기부터 시작되는데 수강생들의 칼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탁탁탁 탁탁탁...."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에 반해 나는 "탁.................... 탁.................... 탁"


마늘 다지기에서부터 시간을 엄청 오래 썼다. 선생님은 나의 칼질이 답답해 보이셨는지 학습부진아를 돕기 위해 줄곧 내 주변에 계셨다.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하면, 난 요리의 달인이 되어서 내가 하는 음식은 다 맛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식 조리사 자격증 과정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정확한 레시피를 알려주는 과정이 아니라 '간'의 조정은 개인이 알아서 하고 제한된 시간 내에 두 가지 음식을 만들어 예쁘게 담아내는 과정이었다. 30분 안에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를 만들어서 접시에 예쁘게 플레이팅 하기' 뭐 이런 식이었다. 물론 계란말이를 만들 때 소금이나 설탕을 어느 정도 넣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선생님께 물어보니 그건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른 거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수업 시간은 즐거웠다. 맛은 없었지만, 내가 밀 키트를 쓰지 않고 A부터 Z까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게 너무 뿌듯했다. 정말 내가 만든 음식은 다 맛있었다 (그렇다. 나는 음식 나르시시스트였다).


그날 배운 요리는 수업 끝나고 앉아서 전부 섭취했다. (식중독 때문에 집에 가져갈 수 없었다. ㅠㅠ) 그런데 문제는 집에 돌아와서 수업 시간에 배운 대로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재료 손질이 너무 힘들었다. 요리학원에선 손질과 세척된 재료가 필요한 양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집에서 직접 해보려 하니 재료를 각각 구매해야 했고, 소량의 재료를 판매하지 않다 보니 한번 요리하고 나면 식재료가 너무 많이 남아서 처치 곤란이었다. 재료를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 구매한 재료를 한 번에 다 조리하곤 했는데, 버리는 재료는 줄었지만, 며칠간 같은 메뉴의 음식을 계속 먹어야 하는 애로 사항이 생겼다.


작가의 이전글 끈기가 없는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거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