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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Dec 26. 2020

#79 크리스마스에 생긴 일

 

1999년 겨울, 미국에서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모든 학생들이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비행기 표값을 아끼기 위해 기숙사에 남았다. 몇 명은 그래도 기숙사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해 겨울엔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텅 빈 4층짜리 기숙사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우울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큰 마음을 먹고 신라면 하나를 끓이기로 했다. 당시 신라면의 가격은 1.50$이었고 일본 탑라면은 15 센트 하던 시절이었다. 일본 라면의 10배나 하는 신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날에만 있는 일이었다.


당시 내가 공부하던 로간이라는 도시는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어 한국 음식을 구하기 힘들었다. 월마트에서 김치를 팔기는 했지만 미국 사람 입맛에 맞춘 이상한 김치였고, 한국 라면은 육개장 사발면만 입점되어있었다. 한국 학생들은 한국식 김치와 신라면을 구하기 위해 기숙사에서 2시간 떨어져 있는 솔트 레이크 시티에 있는 한국 마트에 갔다. 왕복 4시간을 운전해서 구한 신라면과 한국식 김치는 정말 특별한 날에만 먹기 위해 아껴 먹었다. 기쁜 날, 슬픈 날 혹은 그때처럼 우울한 날에만 먹었다.


그렇게 풀이 죽은 채로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갑자기 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다.)


"Hello?"    

"손주부! 나야! 잘 지내냐?"

"우와, 이게 누구야! 너무 오래간만이다!"


일리노이주로 유학 간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친구도 방학인데 집에 가지 못하고 기숙사에 남겨져 울적한 마음에 내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 둘은 동병상련을 느끼며, 거의 한 시간 동안 폭풍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신나게 수다를 떠는데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갑자기 비상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삐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리~"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어마어마하게 큰 비상벨 소리에 깜짝 놀라 방을 나왔는데 부엌에서 시꺼먼 연기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앗, 라면을 불위에 올려놓고 깜빡했다!'


부엌으로 급히 달려갔다. 라면 냄비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가을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캠프 파이어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급히 불을 끄고 시커멓게 타버린 라면과 냄비를 싱크대에 있는 차가운 물에 담갔다.  


"치이~~~~~~~~~~~~~~~~~~~~~~~~~~~~~~~~~~~~~~~~~~~~~~익"


조선시대 때 죄인을 고문하기 위해 시뻘겋게 달구었던 인두를 몸에 지질 때처럼 시뻘겋게 달궈진 냄비는 차가운 물과 만나자 무서운 소리를 내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Fire Sprinkler가 작동된 것이다.


"오 마이 갓!"


기숙사 안은 물바다로 바뀌었고, 화재 방지용 물에 맞은 나는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또 다른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위~용~ 위~용~ 위~ 용~"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Is anybody here?"


소방관 아저씨들이 그렇게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아저씨들은 물에 빠진 생쥐같은 내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크리스마스 날에 소방서에서 대기하느라 심심했는데, 나 때문에 그 심심함이 가신 모양이었다. 다음부터 요리를 할 때는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해 주시고 아저씨들은 돌아가셨다.


그렇게 한 바탕 소동을 치루고 난 후 꿀꿀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월마트에 갔다. 그곳에서 맛있는 과자도 사고 영화 DVD도 사서 행복한 한 해를 마무리 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이웃집 토토로"란 영화를 발견했다.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전에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을 즐겨보지도 않았으며 DVD 표지가 내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에 홀린 듯 DVD를 구매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혼자 "이웃집 토토로"를 감상했다.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사츠키와 메이 자매




2020년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딸아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 "이웃집 토토로"를 보게 되었다. 아이들과 영화를 보고 있는데 21년 전 일들이 떠 올랐다. 당시에 영화를 보며 "사츠키와 메이"처럼 예쁘고 귀여운 딸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내 옆에 정말 귀여운 두 딸아이가 앉아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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