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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an 19. 2021

딸아, 사랑해!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


2020년은 정말 버라이어티 한 한 해였다. 회사에서 홧김에 사표를 던졌고, 집안에 돈을 벌어오는 사람에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전업주부의 삶은 생각보다 녹녹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이들 밥 챙겨주고, 설거지하고, 빨래 개고, 집안 청소하고, 온라인 학습까지 챙겨주다 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아이들이 학교라도 갔으면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을 터인데, 코로나로 인해 하루 종일 같이 집에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6시면 집에 오던 아내의 퇴근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학교 선생님인 아내는 온라인 강의 자료를 만드느라 매일 늦게 집에 왔다. 몸이 힘드니 퇴근한 아내에게 짜증을 많이 내었다. 아내가 퇴근하면 일하느라 고생했다고 위로해주기는 커녕, 짜증만 내니 아내도 집에 오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첫째에게 2차 성징이 왔다. 평소와는 달리 조그만 말에도 상처를 받고 눈물을 글썽였다. 휴대폰을 통해 또래들과 카톡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아이돌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잔소리 안 하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잔소리가 하고 싶어 졌다.


"휴대폰 너무 오래 하는 것 아니니?"

"용돈을 받으면 저금도 좀 해야지, 아이돌 굿즈 사는데 모두 써버리는 소비 습관은 안 좋은 것 같은데?"


진짜, 이렇게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꾹 참았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동요된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힌다.




12년 전, 딸아이가 기어 다닐 때 오래된 작은 전셋집에서 살았다. 집이 너무 오래되어서 여름에는 바퀴벌레들이 자주 출몰했다. 그래서 패치형 바퀴벌레 약을 구매해서 집안 구석구석에 붙여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는 요리를 하고 나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기어 다니는 딸아이가 검은색 무언가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달려가서 확인해 보니 소파 밑에 설치해 둔 검은색 바퀴벌레 약을 들고 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에 있던 하얀색 바퀴벌레 약이 밖에 빠져나와 있었고 딸아이 입 주변에 하얀 것이 붙어있었다.


'헉, 어떡해! 딸아이가 바퀴벌레 약을 먹은 것 같아!'


바로 딸아이를 안고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접수를 하고 의사 선생님께 딸아이 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나는 1분 1초가 너무 긴박해서 높은 어조로 도와 달라고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너무나도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바퀴벌레 약 패키지는 가져오셨나요? 그게 없으면 정확한 조치를 취할 수 없어요. 그리고 지금 대기 환자분이 많으니깐 환자분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이 말을 듣는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바퀴 약 패키지는 이미 분리수거 때 버렸기 때문이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도 우리 진료 차례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차례가 오더라도 의사 선생님은 심드렁하게 위세척이나 장세척을 하자고 말씀하실게 뻔했다. 정말 바퀴벌레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위세척은 아이에게 정말 힘든 일이 될 것 같아 망설여졌다.


딸아이의 상태를 보니 생글생글 웃고 있어서 약을 먹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바퀴약을 먹지는 않고 가지고 놀다가 얼굴에 조금 묻었는데 아내와 내가 너무 놀라서 호들갑 떤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응급실에서 그렇게 2시간 정도 있었는데, 딸아이의 상태는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오해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딸아이는 아프지 않고 다음 날에도 건강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기어 다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 딸아이를 지켜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딸아이를 건강히 지켜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살다 보니, 딸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 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까먹게 되었다. 그리고 딸아이가 건강한 것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딸아이가 건강하니 이제 다른 욕심이 생긴다. 책도 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들었으면 좋겠고,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딸아이의 모습을 멋대로 만들어 놓고 그 잣대에 딸아이가 맞지 않으면 딸아이를 미워했다.  


사춘기 딸아이와 다투고 난 어느 날 밤, 혼자 거실에 남아서 와인을 홀짝이며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라는 단편 영화를 보았다. 영화에서도 우리 가족처럼 너무나도 행복한 가족이 등장했다. 그리고 우리 집처럼 부부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심지어, 딸의 나이도 우리 딸아이와 같았다. 그렇게 행복했던 어느 날 엄마는 학교에 간 딸아이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If anything happens I love you"

"내게 어떤 일이 생겨도, 엄마를 사랑해!"      


그 문자를 마지막으로 딸아이는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40대 아저씨가 다들 잠든 밤에 거실에서 혼자 영화를 보다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 나는 왜 이렇게 욕심을 부리고 있는가?'


추신 : 구독자님들 덕분에 얼마 전 넷플릭스 스토리텔러 작가로 당선되어, 영화 및 드라마 감상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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