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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부 Jul 09. 2020

#13 퇴사 후 삶

퇴사자의 심리

15년간 좋은 직장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잘 지냈다. 매달 따박 따박 들어오는 월급이 참 좋았다. 우리 회사는 호봉제 회사였기에, 매년 월급도 조금씩 인상되었다. 직장 생활의 최정점은 러시아에서의 주재원 생활이었다. 주재원으로 생활할 시 한국에서 주는 월급과는 별도로 집세가 나왔다. 뿐만 아니라, 차량과 함께 유지비도 지원되었고, 아이들을 학비 높기로 악명 높은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딸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러시아 부자들이 다니던 학교였는데, 반 친구들이 생일 파티를 할 때면 레스토랑 전체를 빌려서 생일 파티를 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도 최상류 층에 속한 듯한 착각에 빠졌고 점점 거만해져 갔다.


꿈같던 주재원 생활이 끝나고 서울 본사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복귀하자마자 현실에 부딪혔다(요즘 말로 현타가 왔다).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이 2억 정도였는데, 그 돈으로 서울 시내 아파트 전세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았다. 아내가 원하던 집은 학군이 좋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는데, 학군이 좋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항상 전세가 비쌌다. 그 당시 나의 심정은 일진이 나에게 100원을 주면서 매점에 가서 바나나 우유랑 빵 좀 사 오라고 말할 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재건축을 앞둔 나보다 형님인 아파트 전세를 구했다. 러시아에서 네이버 매물을 보고 구한 집이라서 집 내부를 보지 못했고, 가격만 보고 집을 계약했다. 한국에 들어와서 처음 전셋집을 보러 가던 그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파트는 오래되어서 내 손에 튀어나온 핏줄처럼 페인트 칠이 되어 있었고, 주차 공간이 부족해서 이중주차가 되어있었다. 러시아에서 전용 주차공간과 남부 프랑스풍 가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던 아파트에서 40년도 더 된 아파트로 처음 이사 오던 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말했다.

아빠 우리 이제 거G된 거야?




얼마 전에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한 이유는 다양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내 삶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였다. 15년간 누군가의 지시만 받고 짜인 규율에 맞추어 지내왔는데(학창 시절까지 합하면 거의 30년이 넘는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런데, 30년 간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던 것일까,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삶이 익숙지 않은 것인지 불안감이 엄숙해 온다.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일하면서 사는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


쇼생크 탈출을 보면 50년간 감옥에 지냈던 모범수 브룩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냈던 브룩스는 감옥이라는 체제하에서 완벽하게 적응해서 잘 지내고 있었다. 너무 잘 지내다 보니 모범수로 선정되어서 가석방이 되는데, 자유를 얻게 된 브룩스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감옥 안에서 브룩스는 인정받는 모범수에 책을 많이 읽은 배운 사람이었지만, 감옥 밖에서의 브룩스는 나이 먹은 전과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50년간 감옥에서 길들여진 브룩스는 감옥에서 나와 자유가 주어졌지만 세상은 또다시 적응해야 하는 곳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오랜 친구도 동료도 없는 삭막한 사회일 뿐이었다.

시키는 대로만 살다가 내가 처음 내 스스로 시작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브런치에 글쓰기다. 글쓰기는 여러모로 좋다. 일단 돈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작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우아함이 '백수 아빠'보단 좋아 보인다. 주변에서 글을 쓴다고 해서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며 안쓰런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돈이 벌리기 시작했고 내 마음이 풍요로워 지기 시작했다. 한 달 전부터 일상의 글들을 브런치에 차곡차곡 쌓아갔고, 브런치 통계를 통해 확인된 인기 있는 글을 잡지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런치 가입이 오늘로 딱 한 달이 되는 지금, 한 월간지에서 내 글을 싣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원고료를 얼마나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금액을 떠나 글로써 처음 버는 돈인지라 너무 기분이 좋다.  


퇴사 후 불안감이 엄숙해 올 때 브런치 글쓰기 말고도 난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찾아보았다. 찾다 보니 많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커튼을 걷고 이불을 갠다.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아침을 준비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출근하는 아내를 배웅하고 아이들 온라인 수업을 도와준다. 점심 식사 때가 되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해서 먹인다. 내가 회사를 다녔다면 고용된 유모가 와서 할 일인데, 직접 아이들을 돌보고 있으니 아이들도 좋아하고 아직 쓸모가 있는 사람이란 느낌을 주어 나에게도 좋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술만 마시고 사업 구상만 계속하는 '백수 아빠' 보다는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 살림을 하는 '작가'가 훨씬 낫지 않나란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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