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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Aug 20. 2020

사랑은 이렇게 변해간다.  

결혼 13년 차 부부의 사랑론

애들 재운다고 동화책 읽어주고 나오니 벌써 열한 시 반이 넘었다. 방에 가니 마누라는 벌써 코 골면서 자고 있다. 오늘따라 코 고는 소리가 더 큰 것을 보니 직장에서 많이 힘들었나 보다. 침대 가운데에서 이불 둘둘 말고 대자로 뻗어 자는 와이프 잠 깰까 싶어 구석에 쭈그리고 누워 잠을 청해 본다.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켜본다. 요즘 브런치 중독된 거 같아서 아침에 앱을 지웠는데, 다시 다운로드하고 있는 날 발견한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A 작가님의 글이 오랜만에 업데이트되어 읽어본다. 글과 함께 열심히 운동하고 나신 후 전신사진도 찍어 올리셨다. 음, 역시 상상했던 대로 멋진 분이시다. 내 배에는 없는 복근도 있으시다. 글을 읽고 나서 자극받아 괜히 거실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해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 너무 열심히 운동했나 보다. 운동하고 나니 당 떨어졌다. 야식 먹어야겠다.


한 손에는 익히지 않은 부순 라면을 집어먹으며 오랜만에 올라온 L 작가님 글을 읽으러 가본다. 이분도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다. 사랑에 관한 시였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작가님의 시에서 사랑의 달달함이 느껴졌다. 읽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시였다. 그리고, 사랑의 달달함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게 언제 즈음이었는지 돌이켜 본다. 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결혼 13년 차가 되니 사랑의 달달함은 빠지고 구수함만 남았다.


아내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연애할 때랑 신혼초에 나에게 정말 잘했다. 출근할 때 내 가방 안에는 손편지가 군데 군데서 발견이 되었다. 해외 출장을 가는 날이면 며칠간 보지 못한다고 울먹거렸다. 그리고 내가 잘 도착했다는 카톡 메시지를 받을 때까지 아내는 잠을 자지 않았다. 하루는 이런 날도 있었다. 내가 담당하던 협력사 직원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2차로 노래방에 갔는데, 노랫소리에 시끄러워서 2시간 정도 전화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노래방에서 나오면서 부재중 전화가 아내로부터 10통이나 온 것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잠을 자지 않고 울고 있었다. 내가 전화 연락이 되지 않자 추운 겨울에 술 마시고 쓰러져 길거리에서 자다 객사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우는 아내에게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서 기다리다 지친 아내를 먼저 재웠다.


결혼하고 1년 만에 첫째가 태어났고 2년 뒤에 둘째가 태어났다. 첫째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가 좀 살만해지니깐 둘째가 태어났다. 아내는 육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든 신경이 아이들을 향하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내의 2순위가 되어있었다. 출근 가방 안에 있던 손편지는 사라졌고 해외 출장을 아무리 가도 이젠 울먹이지 않았다. 어쩌다 발견한 쪽지를 펴보면 해외 출장 시 면세점에서 사 와야 할 쇼핑 리스트가 적혀있었다. '아내의 손편지가 그립다'고 하느님께 기도했더니 이런 식으로 응답해 주시는 건가요? 갈색병, 수분크림, 토너, 틴트......... 왜 이리도 얼굴에 바르는 게 많은지 게으름뱅이인 내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생각해보니 이 얼굴을 가지고 여자로 태어났으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더 덕지덕지 발랐을 것 같다.


얼마 전에 대학 동기들을 만나서 밤늦게 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 즈음 휴대전화를 확인했는데, 부재중 전화가 한통도 없다. 아내는 이제 내가 늦게 들어와도 걱정하지 않고 바로 취침 모드에 돌입하신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나이 생각 안 하고 20대 때처럼 마시다가 진짜 필름이 끊겨 버렸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은 안 나고 길에서 넘어졌는지 침대 시트가 온통 피투성이다. 아내는 피투성이 된 나를 발견하고 나서 40넘은 사람이 20대처럼 논다고 잔소리한다. 아, 오랜만에 듣는 잔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을 줄이야. 나에게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으니 잔소리를 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잔소리보다 무관심이 더 싫다. 여름밤이어서 그렇지 겨울밤이었으면 길거리에서 객사할 뻔했다고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 빨간약을 꺼내어 팔다리에 발라준다. 가만히 잔소리하는 아내를 지켜보는데 그냥 기분이 좋다. 손만 잡아도 심장이 콩닥콩닥하는 그런 달달한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없겠지만 빨간약 발라주는 아줌마랑 하는 사랑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콩닥콩닥하는 느낌은 아내가 화낼 때마다 느낄 수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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