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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Jun 17. 2020

직장생활이 제일 쉬웠어요?

회사 관두고 살림 사는 남자

난 세상에서 직장생활을 제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일단 내 몸의 자유를 회사에 온전히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90년대생과 달리 70년대생인 나는 몸이 아파도 상사들의 눈치가 보여서 휴가를 잘 쓰지 못했다. 하루는 장염에 걸려서 체온이 39도까지 치솟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결국 병원에 실려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회사에서 막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학창 시절 공부를 곧잘 해서 타인의 부러움을 받으며 사는 것이 익숙했는데, 회사에 들어오니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새로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영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일어, 러시아어 등 제2외국어를 하나씩 더 구사하고 있었다. 내가 신입 시절에 영어를 잘 못하는 상사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후배들이 영어만 할 줄 아는 날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살림을 살게 되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커튼을 치고 아이 엄마가 마실 커피를 준비한다. 물을 끓이고 커피 원두를 간 다음 커피를 내린다. 향긋한 커피가 집안을 진동할 때 즈음이면 커피 향기를 맡고 와이프가 일어난다. 와이프는 아침에 커피 한잔이면 되는데, 아이들은 아침에도 한식을 선호한다. 밥, 국, 반찬을 요구한다.


그리고 순간 해외출장 중에 한식을 선호하던 직장 상사분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들은 삼시 세끼 모두 한식을 원하셨고, 그 준비를 내가 해야만 했다. 당시 막내였던 내 캐리어의 99%는 각종 라면과 반찬, 그리고 햇반으로 가득했다. 입고 있는 정장과 속옷 한벌밖에 못 챙겼다. 덕분에 출장 기간 내내 한 가지 옷만 입고 다녔다.  회사를 관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한식만을 요구하는 두 딸을 보며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잠시 고민한다.


아이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설거지를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막내는 아직도 식사 중에 음식을 많이 흘린다. 식사를 한번 하고 나면 식탁 위는 물론이고 바닥과 의자까지 전부 빨간색 음식물로 꾸며주신다.


이렇게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아침 6시부터 일어나서 무리한 탓인지 살짝 잠이 온다. 하지만, 이렇게 자버리면 밤에 잠이 안오기 때문에 나른함을 누르며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째 장소만 회사에서 집으로 바뀌었지, 컴퓨터를 켜고 일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보고서 글을 쓰다가 이젠 브런치에 글을 쓴다.


보고서 쓰기와 달리 브런치 글 쓰기 할 때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글 쓰다 허리가 아프면 침대에 누워 뒹굴어도 되고 유튜브를 봐도 된다. 회사에서 일하다 허리가 아파오면, 누울 곳이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기대어 통증을 달랬다. 보고서를 쓰면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지만, 글을 쓰면 몸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회사 관두고 누리는 일상이 참 좋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과 하루 종일 있다 보면, 가끔은 회사에서 하던 회식이 그립니다.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과를 마시고 시원한 맥주 한잔이 그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내가 조기 은퇴자로 분류되어 혼자 외로운 길을 가고 있지만 몇 년 후 친구들도 본격적으로 은퇴하기 시작하면, 같이 놀 친구들이 생기지 않는가?


아,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애들 점심 차려줄 시간이다. 코로나 덕분에 애들은 삼식이가 되었고, 나의 요리 실력은 매일 일취월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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