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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ian 손주부 Nov 04. 2020

#47 자기야, 제발 착하게 살지마!

친구들끼리 모이면 종종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다. 신입사원 시절 때는 모이면 상사 욕을 했다. 금요일 오후 6시가 다되어서 업무지시를 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단체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잔에 술을 안 따라줘서 찍혔다는 이야기까지 서로 경쟁하듯이 상사 욕을 했다. 세월이 흘러 친구들 대부분이 중간 관리자가 되었을 때는 일 못하는 후배 욕을 했다. 요즘 것들은 싹수가 없다느니, 기계처럼 시키는 일만 한다느니, 인사를 제대로 안 한다느니,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마음껏 험담 했다.




살아가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평가는 "착하다"였다. 이런 나의 성격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잘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불쌍한 엄마 때문에 착한 아들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는 전기도 안 들어올 정도로 가난한 집 장남에게 시집을 왔다. 시누이가 4명이고 시동생이 2명이나 있는 집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잔소리에 엄마는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명절 때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모든 가족이 모이면, 부엌에서 항상 일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고모 4명은 대청마루에서 뒹굴 거리면서 엄마가 내어 놓는 음식을 먹기만 했고, 남자들은 둘러앉아서 화투를 치거나 TV만 봤다. 5살 어린이가 생각하기에도 이건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다가가 친척들 모두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왜, 부엌에서 우리 엄마만 일을 하는 거예요? 같이 하면 안돼요?"

이 말을 하자마자 할머니에게 크게 혼났다. 그리고 엄마도 할머니에게 혼났다.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라는 식으로 혼이 났던 것 같다.


불쌍한 엄마가 유일하게 화풀이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불쌍한 엄마를 위해 나는 착한 아들이 되어야만 했다. 엄마 말씀 잘 듣고, 거역하지 않으면서 자라야 했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엄마가 도망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나는 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 5명이서 여행을 가게 되면 뒷자리 가운데 석은 항상 나의 차지였다. 내가 조금만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때 친구들 여러 명이 모여 여행을 가면 식사 후 설거지는 항상 내가 도맡아 했다.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보다 내가 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나만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하니깐.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착하다는 말이 점점 듣기 싫어졌다. 착하다는 말이 어느 순간 "호구"라는 의미로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착하게 살았더니 회사에서 난 이미 호구가 되어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의 궂은 일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일은 많은데 실적은 나지 않는 일)이 나에게 모이기 시작했다. 주변 동료와 선배들은 내가 착하다는 것을 악용했다. 몸은 하나여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쳐내도 일은 계속 주어졌다. 남들은 칼퇴근하는데,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했다. 회사 상사는 오후 10시에도 전화를 해서 급히 번역 좀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업무 지시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장염에 걸려 고열로 끙끙 대면서도 소심해서 조퇴도 못하고 일을 했다. 그러다가 쓰러져 병원에서 링거를 맞았다.


어떤 선배는 대학원 숙제를 내게 주면서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어 원서를 읽을 시간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니깐, 미국에서 공부한 네가 좀 대신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착한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깨달음이 왔다.


'내가 착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왜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 거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내 머리를 때리는 순간 더 이상 착하게 살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이기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상사가 근무시간 이후에 부당한 일을 지시하면 출근 후 처리하겠다고 정중히 거절을 했다. 친구들끼리 자동차를 타면 가운데 자리에 먼저 앉지 않았다. 여러 명이서 식사를 한 후 설거지를 누군가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예전처럼 먼저 나서서 하지 않았다.


착하지 않게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예전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받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아, 이제 상사에게 찍힌 것 아니야?'

'친구들이 나를 안 좋은 사람으로 보는 것 아냐?'

이 같은 생각으로 내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그래도 밀고 나갔다. 이렇게 바뀌지 않으면 평생 호구로 살 것 만 같았다.  




결혼하기 전에 아내의 직장 동료들과 다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아내 동료들로부터 들은 아내에 대한 평판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착하다'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아내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을지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임신을 했고 육아휴직을 내었다. 육아휴직을 마칠 무렵 내가 해외 발령이 나서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해외에서 살았다. 덕분에 아내는 8년 동안 직장 생활을 쉴 수 있었다. 한국이 그립긴 하지만, 한국에서 힘들게 하던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가족들하고만 지내는 삶에 아내는 너무 만족해했다.


그랬던 아내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내가 착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착한 아내는 직장에서 온갖 힘든 일을 모두 떠맡았다. 실적도 안 나고 시간만 오래 걸리는 그런 일들을 잔뜩 맡은 것 같았다. 퇴근 후에도 아내는 밤늦게 까지 일을 한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면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아내의 직장 정문에서 칼퇴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억울한 마음이 차올랐다.


혹시라도 나중에 아내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꼭 하고픈 말이 있다.

자기야, 제발 착하게 좀 살지마! 밖에서는 못되게 살고, 나한테만 착하게 살면 안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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