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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Mar 19. 2021

공부에 자유를 가진 적이 없을 때

학교 교실 안,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이 앉아있다. 그중에 스스로의 선택으로 앉아있는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정말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학교에 가는 학생들도 있을까? 아이들은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매일 학교에 간다. 배움에는 왜 선택과 자유가 없을까?


학생이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은 의무가 맞다. 인생 첫 학교인 초등학교는 훗날 사회생활을 원만히 할 수 있을 만큼 배우고, 민주시민역량을 기르기 위해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가야 하는 곳이다. 학년이 올라가고 점점 어려운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는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며 자기 효능감을 기르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주어진 인생을 보다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다. 모든 국민이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지위에 차별 없이 그런 능력을 갖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국가에서도 초등학교, 중학교를 의무교육으로 정해 놓았다. 21학년도부터는 고등학교도 무상교육이 되는 것 역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의 과정은 어떨까?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야 하는 것은 의무가 맞지만 어떻게 공부할지, 또 얼마큼 공부할지도 선택과 자유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일일까? 과연 우리 아이들의 공부 과정에 대해 얼마만큼의 자유와 선택이 주어지고 있을까?


캐나다 해외연수기간 동안 출근하게 된 학교는 한국인 유학생이 많은 학교였다. 거기에는 수년간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친 덕에 한국 교육환경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교사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교사가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꺼냈다.


"한국에서 온 학생들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한국에 비해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때문에 캐나다 학교에서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 교사의 논리였다. 캐나다 초등학교에서는 바닥에 엎드리든, 친구 책상 옆에 함께 앉든, 교실 소파에 앉든, 공부하는 방식에 대해서 교사가 딱히 제재하지 않는다.(물론 교사 설명이 끝난 개인 활동시간에) 어디서 공부를 하든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이 소리를 지르거나 떠들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친구랑 노느라고 해야 할 일을 안 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그런데 막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그 자유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꼭 선을 넘는다는 거다. 교사가 '해라,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면 그대로 잘 따라 하지만, 그런 구속이 없을 때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 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유를 가진 적이 없어서 어떻게 자유를 사용하는지 모른다.'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다.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자유다. 그 교사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에게는 항상 교사나 부모의 구속이 있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잘한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제한이 없을 때는 자기 의지적으로 얼마큼 어떻게 공부할지 제대로 선택할 줄 모르거나 아예 선택하기를 포기해 버린다는 말이었다.


바닥이든 책상이든, 혼자든 둘이든, 해야 할 일을 제 때 하기만 하면 된다.


정말로 그런지 한국 교육환경과 비교하며 캐나다 학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학교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맞다. 일제히 움직이며 각 맞춰 줄 서는 일도 없고, 쥐 죽은 듯 고요해야 하는 순간도 없다. 아침에 핸드폰을 걷지도 않는다. 고학년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도 제 할 일이 끝나면 핸드폰을 하기도 하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기도 한다. 해야 하는 숙제도 거의 없고 예체능 말고는 가야 하는 학원도 없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수업 시간에 학생이 잘 따라오지 못하는 것도 학생이 질문하지 않는 한, 딱히 교사가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필평가도 없고 수행평가뿐이니 수업 시간에 아이가 해 놓은 결과물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뿐이다. 잘했으면 잘 한대로, 못 했으면 못 한대로.


그 자유롭다 못해 쿨한 캐나다 교사들의 태도가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 교사들은 한 명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지 않나. 잘 못 따라오는 아이들이 있으면 쉬는 시간에 따로 불러 가르쳐주기도 하고, 개인별 숙제를 내 주기도 한다.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서 공부를 시키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교육청 차원에서 학습결손 및 학습부진학생을 파악하고 관리하게끔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각 급 학교에 배포하기도 했다.


한국 부모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부모가 아이의 학습 매니저를 자처하고 어떻게든 공부를 잘하게 해 주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공부하는 동안에는 함께 TV를 포기하고 옆에 있어주는 부모들도 많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지인들은 한국 초등학생은 왜 이렇게 할 게 많냐며 어떻게 친구들을 따라잡을지 난색이었다. 한국에서는 주변 분위기 탓에라도 아이의 공부에 쿨하기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자기 주도 학습이 대세다. 자기 주도 학습은 부모나 교사가 아닌 본인 스스로 공부의 과정을 결정하는 공부 방식이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요즘은 하다못해 이유식도 자기 주도 이유식이 유행이란다. 그런데 아기가 먹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엄청난 노력과 참을성이 필요하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부모가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것이 사실은 부모에게 가장 편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이가 스스로 먹을 것을 선택하고 탐험하게 하려면 손이 많이 간다. 스스로 음식을 집을 수 있도록 모양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마음껏 만져보고 던져도 청소가 쉽도록 주변정리도 해야 한다. 엄마가 뚝뚝 떠서 입에 쏙쏙 넣어주면 빠르게 끝날 일을 아이가 먹도록 기다려야 하니 시간도 배로 들 수 있다. 그뿐인가. 오늘 엄마가 먹이고 싶은 건 당근인데 엄마 속도 모르고 아이가 며칠 내내 먹었던 단호박만 집어 먹으면 애가 탄다. 엄마가 당근을 집어 단호박과 함께 몰래 쓱 입에 넣어주고 싶지만 그 유혹도 참아내야 한다. 지금 우리 아기에게는 단호박보다 당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공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기 주도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부모와 교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마치 캐나다 교사들처럼 아이의 공부 방식에 다소 쿨해져야 한다. 인내하고 믿어주고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내가 떠먹여 주지 않으리라는 굳은 다짐이 필요하다. 떠먹여 주고, 그래도 먹지 못하면 윽박을 질러서라도 먹고 말게 하는 공부 방식으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속 떠먹여 준 아이는 숟가락을 쓸 줄 모른다. 자유를 가져본 적이 없어 자유를 컨트롤하지 못하는 일부 한국 조기유학생들처럼 말이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 주도 학습이라고 하면 상대적으로 부모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부모나 교사에게는 옆에서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억지로라도 떠먹여 주는 교사였다. 캐나다 교사들처럼 공부를 시키려면 아마 속이 터질 것 같다. 알아서 잘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으니까. 그러다 보면 교사나 부모만 애태우며 동동 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이가 아니라 교사나 엄마만 발을 구르고 있다면 그건 진짜 공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가짜 공부로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기르고 자라야 할 것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은 애타는 부모가 현재 수준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아이를 재촉하고 윽박지르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의 자아존중감, 자아정체성, 부모 자식 간 또는 교사 학생 간의 유대 관계 같은 소중한 가치 말이다.


아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려 한다. 아이는 당장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낙타에게 채찍질을 해가며 경주마처럼 달리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처음에는 잘 가는 것 같다가도 결국에는 지쳐 쓰러져버리거나 채찍질하는 사람을 뒷 발로 차 버릴지도 모른다. 낙타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가더라도 그 과정에서 진짜 길러야 할 능력들을 기르고 터득하며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다.


한 걸음이라도 스스로 갈 수 있도록 자유를 쥐어주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격려해 주자. 아이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를 것이다.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질 것이고,  그 의지로 적절한 전략을 세워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었을 때 나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신념이 높은 아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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