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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May 18. 2021

너 이탈리아 산모인 줄 알았잖아.

캐나다에서의 첫 출산.

차 안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다가 병원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양수가 터졌다. 간호사들은 나를 보자마자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내듯 후루룩 내 옷을 벗겼다. 진행 상황을 묻고 따지고 할 것 없는 몰골이었으니까.


콧구멍에서 무가 나온다고 생각하라던 출산의 고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 시작되자 당황스러워졌다. 고상하게 끙끙 앓던 소리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체면이고 뭐고, 정신 차리고 보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쏘리!!!!! 쏘리!!!!!!! 쏘리!!!!!”


^^;

아프다고 표현은 해야겠고 한국이 아니니 영어로는 해야겠고. 패닉에 빠진 상태로 머릿속에 있는 영어단어를 되는대로 붙잡은 말이 '쏘리'였던 것이다.




이건 다 한국에서 첫째를 낳았던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던 무경력 산모는 뭐든지 미안해야 했다. 간호사를  자꾸 불러서, 제대로 힘 줄 줄 몰라서, 의사를 기다리게 해서. 고통을 지워 준 무통주사는 막상 출산에 임박하자 힘을 제대로 줄 수 없게 만들었다.


"엄마가 이렇게 힘 못주면 포셉으로 아기 머리 당겨서 꺼내야 되는데."


은근히 반말을 섞으며 협박(?)하던 한국 산부인과 의사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치사하기 짝이 없다. 안 그래도 주눅 들어 뭐든지 내 탓 같은 초보 엄마에게 그런 죄책감을 심어주다니. 커서 자식이 잘못되면 귀책사유를 찾다 못해 '모유를 못 먹여서'까지 간다는 사람이 엄마 아닌가. 나 역시 아기 두상이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일 때마다 내가 그때 힘을 못 줘서 그런가 싶어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캐나다 간호사들도 패닉 상태로 쏘리!! 만 외쳐대는 동양 여자가 퍽 당황스러웠나 보다.


"허니, 왜 그래. 네가 뭐가 미안한데.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 없어. 이제 아가가 곧 나올 거고 내가 도와줄게."


ㅜㅜ

미안할 필요 없다는 간호사의 말에 마음이 진정되었다.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도 간호사도 느긋해 보였다. 네가 준비되면 말하라더니 정말로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의 느긋한 무관심이 고마웠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그제야 진통의 간격이 느껴졌다. 아가가 나오고 싶어 하는 타이밍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 준비됐어."


느긋하게 기다리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신속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드디어 내 두 번째 아가가 세상에 나왔다. 아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탯줄을 단 채로 내게 건네어졌다. 찐덕찐덕한 것을 잔뜩 묻히고 아무것도 닦여지지 않은 채로 내 가슴팍 위에 놓였다.


"축하해. 아기 달(Baby Moon)이 태어났네."


간호사가 Baby Moon girl이라 적힌 이름표를 아가 발에 달아주며 말했다. 내 성이 문 씨라 영어로 하면 달(Moon)이 되어서 그렇다. 아기 달이라니. 스위트 한 간호사 덕분에 내 두 번째 아기는 아기 달로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Baby Moon 세상에 태어나다!


후처치를 하는데 간호사들이 농담을 건넸다.


"나 너 이탈리아 산모인 줄 알았잖아. 왜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 원래 이탈리아 쪽 사람들이 아기 낳으러 오면 소리를 잘 지르더라고.ㅎㅎ"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가, 이제는 아기 달을 품에 안았다고 감동받아 눈물을 찔끔거리는 내가 뻘쭘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이탈리아 산모인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떠는 간호사의 농담 덕분에 다 같이 웃음이 터졌다. 캐나다에서 이탈리아 산모처럼 소리를 지르다가 '베이비 문'을 낳은 한국 사람. 그게 바로 나다.ㅎㅎ


힘들었을 텐데 한 잔 하라며 건넨 차가운 얼음물은 노땡큐였지만, (이것이 내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이라는 증거다ㅎㅎ) 그녀가 건넨 농담만큼은 평생을 두고두고 땡큐다. 그녀 덕분에 출산도 유쾌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이제 두상 걱정은 안 해요. 출산 보조기구를 사용해도 동글동글 예쁜 두상 나오니까 걱정 마시기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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