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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Aug 29. 2021

단풍국의 도깨비는 여전히 살아있다.


폭풍 같았던 3 코로나의 기세가 사그라질 때쯤 드디어 province  이동 금지령이 해제됐다. 3 유행은 지독했다. 집에서 반경  키로 이상은 외출이 금지되어 21세기에 상상도  했던 자발적, 비자발적 감금을 당했다. 언제  좀비 떼처럼 달려들  모르는 4 대유행에 대한 불안함을 잠시 내려두고, 나라가 허락하는  안에서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우리를 해방시키기로 했다.


일 년에 딱 9일. 작고 소중한 휴가가 주어졌고 우리는 퀘벡으로 달려갔다. 9시간을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 거리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의 경계를 넘어, 드라마 '도깨비'의 슬픈 사랑의 서사를 담은 곳, 올드 퀘벡으로 떠났다.



Bonjour!

해외여행은 국내여행과는 또 다른 설렘이 있다. 국제선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 곳곳에서 낯선 언어들이 들려온다. 공항의 안내방송,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 낯선 언어가 주는 싫지 않은 긴장감에서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이국적 정취는 평소보다 과감한 옷을 걸칠 용기를 건네준다.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배짱을 준다. 낯선 곳에서의 작은 일탈이 해방감을 주는 그런 여행이다.


물론 현재의 나에게 퀘벡은 국내 여행지다.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하는 유일한 캐나다 땅이지만, 이 넓은 북미 땅에서 고작 9시간 거리로 해외여행만큼의 낯선 설렘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퀘벡주의 경계를 넘자마자 교통 표지판이 프랑스어로 바뀌었다. 꼬부랑글씨에 어리바리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 얼마만의 외국어인지!(영어도 외국어지만ㅎㅎ) 차에서 내리자 정말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가 들려왔다. 진짜 여행이 시작됐다. 그 이국적인 말소리가 나를 완벽하게 새로운 나라로 데려다주었다.



저 시집갈게요, 아저씨한테. 사랑해요 ;)

퀘벡은 그럴만한 도시였다.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도시. 캐나다는 무엇이든 스케일이 남다른 나라다. 호수가 바다만 하고 나무가 빌딩만 한 곳. 뭐든지 크고 광활한 이 나라에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곳이 있었다니.


은탁이가 이제  맺힌 물방울 같은 웃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계단을 시작으로 거리 곳곳에 악사들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타이밍에, 완벽한 무드의 노래를 골라 ! 사인을 받고 재생되는 드라마 사운드 트랙처럼 음악이 장면에 찰떡같이 붙었다. 사람들의 움직임에는 슬로 모션이 걸렸다. 낭만 가득한 분위기에 취해 사람들이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눈에 그렇게 보이는 건지. 눈이 닿는 곳마다, 발이 닿는 곳마다 멜로드라마  편은 뚝딱 나올  같은 곳이었다.


물론 장면의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인생이라는 드라마에는 늘 현실 자각 모먼트가 존재한다. 그 로맨틱한 계단을 앞에 두고 유모차에서 절대 내리지 않겠다는 둘째와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엄마 아빠가 가마꾼이 됐다. 이를 앙다물고 유모차를 들어 올려 계단을 내려왔다. 순간 욱! 할 뻔한 성질머리를 잘 눌러 담았다. 드라마처럼, 영화처럼, 뭐든지 우아하게 용서하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니까.



쓸쓸하고 찬란하神

아름다울수록 슬프다는 것을 여고생 시절엔 알지 못했다. 문학시간에 역설법을 배울 때마다 그것이 왜 텍스트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것인지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 그저 논리적인 모순을 통해 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수사법이라고 머리로 외웠다.


도깨비의 부제 역시 역설로 쓰여있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쓸쓸하고도 찬란한 그 역설의 의미를 퀘벡에 오고 나서야 살아있는 지식으로 알게 된 것 같다.


도깨비 가족의 무덤이 있던 아브라함 언덕에 올라가면 압도적으로 눈부시게 찬란한 풍경이 펼쳐진다. 불멸의 삶을 벌로 받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끊임없이 지켜봐야 하는 도깨비의 쓸쓸함이 이 아름다운 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잠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 풀밭에 앉아있는 침묵의 시간이 쓸쓸하고 찬란함이 어떤 것인지 오감으로 알게 해 주었다.



단풍국의 도깨비는 살아있다. 다행히도.

퀘벡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도깨비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코로나 여파로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는데도 많은 아시아 사람들이 드라마의 장면을 재연하며 사진을 찍었다. 특히 빨간 문을 발견한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행복한 얼굴로 그 문을 가리키며 걸어왔다.


한국에도 유명한 도깨비 촬영지가 있다. 강릉 주문진 해변. 은탁이가 처음으로 도깨비를 소환하는 곳. 꽃말이 '연인'인 메밀꽃을 받는 곳. 도깨비 촬영지라는 점은 같지만 퀘벡은 이곳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이정표나 일부러 만들어 놓은 포토존이 없다는 것. 주문진 해변에 있는 도깨비 촬영지 200m 혹은 사진 찍는 법까지 알려주는 친절한 안내판이 나에겐 영 불친절해 보였다. 저걸 세워두면 드라마의 감정선이 되살아날까. 사람들은 그 안내판으로 정말 그 드라마를 떠올릴 수 있는 걸까.



퀘벡 도깨비 언덕에 '공유가 앉았던 곳 200m' 이정표가 없어서 감사했다. 크리스마스 상점 앞에 '은탁이와 도깨비가 재회한 곳' 안내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하나의 숙제처럼 바쁜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고 나면 해야 할 일을 마쳤으니 굳이 다시 올 필요는 없는 곳이 되어버리지 않았을까.


퀘벡에 다시 오고 싶었다. 9시간이 걸려도 꼭 다시 가고 싶었다. 사진 찍었으니 이제 할 일 끝! 이 아니라, 눈으로, 비로 온다는 찬란하고 쓸쓸한 도깨비를 소환하러 가을에, 겨울에 또 오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마저 역설이다. 보이지 않아서 보이고, 없어서 있는 도깨비. 다행이었다. 찬란한 단풍국에 쓸쓸한 도깨비가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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