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지널)의 품격
캐나다에 사는 한국 사람들에게 "캐나다에 이민 와서 좋은 점이 뭐예요?" 하고 물어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답변이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다. 외모를 간섭하거나 판단하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내 멋대로 사는 곳이라 옷을 내 맘대로 입고,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해도 창피하지 않다. 내가 곱슬머리라 조금 부스스해도 '그게 나야' 하며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외모에 한참 신경 쓸 나이인 십 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는 하교 시간이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 중에 절반 이상이 곱슬머리다. 딱히 예쁘게(?) 관리된 것도 아닌데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닌다. 혹시 파마한 머리는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CGM(Curly Girl Method)을 공부한 이후로, 본 born-곱슬머리와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오히려 천연 곱슬머리인데 빗질을 해서 묶었거나 머리를 폈다는 것까지 눈에 보인다. 모를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캐나다 길거리에 이렇게나 많은 천연 곱슬머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은 어떨까? 길거리에서 펌이나 매직 없이 기른 내추럴 곱슬머리들을 몇 명이나 찾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곱슬머리는 예쁘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어있다. 샴푸 광고에 찰랑찰랑 생머리는 있어도 탱글탱글 곱슬머리는 없다. 사람들에게 곱슬머리는 고민거리일 뿐이다. 생머리처럼 차분해지는 방법을 검색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헤어 도구를 산다. 그것이 모낭에서부터 구부러져 나오는 곱슬머리를 변화시켜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하루를 위해 머리를 펴고 고작 6개월을 위해 매직을 한다.
무엇이 캐나다와 한국을 다르게 하는 걸까?
캐나다에 사는 사람들은 왜 곱슬머리를 감추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캐나다 사람들이 특별히 자존감이 높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민족성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사회 전체가 다양성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주 강한 곱슬머리를 갖는 편인 아프리카계 사람들도 있고, 복슬복슬한 컬을 갖는 편인 라틴계 사람들도 있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모이는 덕분에 캐나다는 한국보다 훨씬 더 다양한 곱슬머리 세계에 노출되어있다.
코일리(Coily) 이상의 컬을 가진 사람이 한국 사람처럼 단 하루를 위해 머리를 펴고 고작 6개월을 위해 매직을 하며 살 수는 없다. 그러니 곱슬머리 전용 미용실이 생겨나는 것이 당연하고, 곱슬머리 전용 제품이 시장에 나온다. 그러다 보면 코일리보다 컬이 약한 컬리나 웨이비를 위한 헤어 제품도 동네 마트에 들어온다. 어떻게 하면 곱슬머리를 더욱 예쁜 곱슬이게 할 수 있는지 영상을 만들고 사람들과 공유한다. 곱슬머리에 대한 편견이 생길 틈이 없다. 너도, 나도, 쟤도 모두 곱슬이니까.
사회에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다양성이 없는 사회에서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어지간해서는 마이웨이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텐데, 직장이 생기고, 지인 네트워크가 생기고, 지금보다 가족 관계가 확장되면 그때도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미용실에 들고 가는 사진이 몇 가지로 정해져 있을 만큼 미의 기준은 한정적이고, 곱슬머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쁜 혹은 단정한 머리는 아닐 텐데.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나 혼자 진짜 내가 되겠다며 곱슬머리를 고수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생긴다. "야, 머리 좀 해. 지저분해."라는 가족과 친구의 말에 조금도 타격받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태어나서 6개월이 지나고 캐나다에 온 내 딸이 고작 만 4살쯤 되었을 때 나에게 물었다.
"엄마, 눈 위에 줄(쌍꺼풀)이 있어야 예쁜 거야?”
마음이 덜컹했다. 가끔 만나는 한국 어른들이 '엄마가 돈 열심히 벌어야겠네.', '엄마는 쌍꺼풀이 있는데 딸은 없네.' 하는 이야기의 뉘앙스를 알아챈 것이다.
우리 사회는 더 다양한 모습의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개인이 흐려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캐나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에 노출된 딸이 타인에 대한 궁금증을 시작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시작으로 오히려 자신을 뚜렷하게 발견하고 세워나가고 있다. 다름이 우리를 헝클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각자가 원하는 모양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마음은 배려나 존중 같은 사회 공동체를 위한 가치처럼 보이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나의 선택, 나의 자유, 타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캐나다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캐나다라는 이민국가를 세워 나가고 있다. 나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기 위해서 남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자로 재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잣대로 재어지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로 기준도, 가치도 자꾸만 나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모양을 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고민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나는 이런 모양을 가졌고, 또 나는 저런 모양을 가졌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사회도 점점 포용할 수 있는 모양의 범위를 넓혀갈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우리에게 곱슬머리가 숨겨져야 하고 고쳐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여기 존재하는 다양한 모양 중에 하나의 모양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썼던 관련 글입니다. :)
https://brunch.co.kr/@ilae9213/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