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지널)의 품격
*탈 매직, 곱슬머리 관리법, CGM(Curly Girl Method)을 모른다면 아래 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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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네디언 친구를 통해 CGM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유튜브에 'Curly Girl Method'를 검색했다가 깜짝 놀랐다. 한국에서는 전혀 모르던 세상인데,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플랫폼에서는 이미 내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일단 다 사서 써 봐?
본격적으로 CGM을 시작하려 하자, 갖춰야 할 제품과 장비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물건들을 다 사자니 생각만으로도 불쾌해졌다. 생긴 대로 살겠다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야 하다니. 결국 곱슬은 돈 잡아먹는 머리가 맞는 것인가! 탈매직하기로 결정한 것은 더 예뻐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태어난 모습 그대로의 나를 찾고 싶었던 건데.
내가 되는 일에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모순이 아닐까?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나의 오리지널리티를 찾으려 시작한 여정이 또 다른 미의 올가미가 되게 할 수 없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미적으로 완벽한 곱슬머리가 아니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내가 내 하루를 간결하게 하고, 그래서 가뿐해진 삶이 그런 나 자신에게 확신을 더해주는 선순환을 원했다. 그래서 나는 제품 발, 장비 발 세우지 않고 가장 소수의 것들로 '진짜 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곱슬머리 여정을 시작한 지 2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까지 내가 새로 장만한 것은 이것(위 사진) 뿐이다. 처음에는 제품 없이 손가락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스크런치-스퀴지로 시작했고, 어느 정도 CGM에 확신이 든 후에는 설페이트가 들어있던 샴푸 하나를 바꿨다. 그러고 나서는 머리카락의 변화를 느끼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제품들을 하나둘씩 들이며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아래 적을 그 과정이 CGM을 시작하는 나의 곱슬머리 동지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제품을 한꺼번에 사 들이지 말자.
제품을 한꺼번에 사들이면 무엇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나의 경우, 처음에는 식물성 트리트먼트를 사지 않고 새로 산 설페이트-프리 샴푸와 기존에 사용하던 린스를 함께 사용했다. 성분표를 보니 식물성은 아니지만 설페이트가 없는 린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존 린스를 다 쓰고 나서 식물성 트리트먼트로 바꿨을 때, 꽤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았다. 모발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덕분에 내 모발이 수분 부족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페이트-프리 린스로는 모발이 필요한 수분을 머금기에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스타일링 제품도 마찬가지다. 원래 쓰고 있던 헤어 에센스와 오일이 있다면 리브 인 컨디셔너와 오일을 당장 장만할 필요가 없다. 컬크림만 새로 사서 기존 제품과 함께 사용하다가, 기존 제품이 다 떨어지면 그때 곱슬머리 전용 제품을 하나씩 들여보는 것이다. 내가 쓰던 제품을 당장 바꾸고 하루빨리 변신하고 싶겠지만, 여유를 두고 천천히, 하나씩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효율적이다.
*스타일링 제품은 나의 컬 타입을 예상하는 것이 먼저다.
리브 인 컨디셔너, 오일, 무스나 젤 등 스타일링 제품은 컬 타입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모발이 얇거나 컬이 느슨한 웨이비(Wavy)는 주로 가벼운 제품을 써야 컬이 처지지 않고, 컬리(Curly)를 거쳐 코일리(Coily)로 갈수록 무거운 제품을 써야 프리즈를 잡고 컬 패턴을 잡아 줄 수 있다.
그래서 무턱대고 사기보다는 스크런치-스퀴지를 통해 어느 정도 컬 타입을 가늠하고 사는 것을 추천한다. 스크런치-스퀴지는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손가락만 있으면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떤 제품도 구입하지 않고, 원래 쓰던 린스와 한국에서부터 썼던 헤어 에센스와 오일을 사용하면서 도포 방법만 스크런치-스퀴지로 바꿔 주었다. 그랬더니 바로 그날부터 큰 S자 컬이 나왔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처음 나온 컬이 진짜 컬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 시작했을 때 컬 모양이 큰 S자를 그리길래 내가 웨이비(Wavy)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시작한 날부터 S자 컬이 나온 것이 오히려 내가 컬리(Curly)라는 싸인이었다.
스타일링 제품 없이 스크런치-스퀴지만으로도 바로 S자 컬이 나온다면, 관리를 하면 할수록 컬리 혹은 그 이상의 컬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본인이 곱슬은 곱슬인데(아마 반곱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스크런치-스퀴지를 해도 당장 컬이 나오지 않는다면 웨이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경우에는 제품을 바르고 관리를 하면 할수록 S자 컬이 나올 것이다.
*남에게 필요한 것이 나에게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한 제품은 일단 CGM을 시작해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곱슬머리 관리법은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컬 타입뿐만 아니라, 머리카락 두께, 머리숱, 머리 길이는 물론이고 사는 곳의 날씨, 라이프 스타일, 본인의 취향까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보자. CGM은 자연건조를 추천하지만 나는 헤어 드라이어기에 끼워 쓰는 디퓨저를 샀다. 저녁보다 아침에 머리를 감고 당장 외출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또 지금은 프리-푸(Pre-poo)용 오일이 필요하지 않지만, 한국에 간다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의 여름이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보다 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CGM은 무조건 누군가를 따라 할 것이 아니다. CGM 리스트가 제시하는 제품 사용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내 모발의 필요와 매칭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단 가지고 있는 제품들로 스크런치-스퀴지를 시작하면 내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은 필요 없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대용품을 찾자.
극세사 수건, 실크나 새틴 재질의 베갯잇과 헤어캡은 모두 기존 수건이나 베갯잇의 거친 표면이 모발 가장 바깥층인 큐티클이 일어나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처음부터 사지 않았다. 이유는 대용품이 있기 때문이다. 안 입는 면 티셔츠 몇 장을 욕실에 갖다 두고 베개에도 씌워두었다.
대용품을 사용하다 보면 나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던지, 아니면 컬 패턴이 너무 무너져서 실크나 새틴으로 바꿔야겠다던지, 하고 감이 잡힐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굳이 새틴 재질 베갯잇이 아니어도, 전화선 머리끈으로 느슨한 파인애플 번을 만들고 자면 다음 날 충분히 리프레쉬할 수 있을 만큼 컬이 잘 보호되고 있다.
곱슬머리를 펴는 것이 하루를 즐겁게 했다면, 곱슬머리로 사는 것은 삶을 즐겁게 한다!
곱슬을 직모처럼 만드는 것은 어려웠어도, 곱슬이 곱슬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전 보다 많은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공부를 하려면 필기구부터 사야 하고, 운동을 하려면 복장부터 갖춰야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곱슬머리만큼은 그러지 말자. 곱슬머리는 원래의 나라서, 생긴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만 해도 절반 이상은 성공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것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 뿌리 매직이나 고데기 없이 곱슬을 길러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그러나 곱슬머리가 어느 정도 길러지기만 하면 나머지는 공들일 필요 없이 손쉽게 따라올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오리지널 내 모습이니까.
그림의 가치는 원본이 갖는다. 머그컵에, 우산에, 액자에 인쇄된 그림은 아무리 예쁜 상품이라도 원본의 가치를 따라갈 수 없다. CGM은 나의 원본을 찾는 과정이다. 그래서 넘쳐흐르는 정보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두 다리를 튼튼하게 내리 뻗어야 한다. 황새를 따라다니느라 가랑이 찢어져 버릇하던 뱁새가 또 다른 뱁새를 쫓아가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머리는 물론이고, 핸드폰 화면 속 또 다른 곱슬머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원본이 되자. 있는 그대로의 나를 끌어안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곱슬머리에게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