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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Jul 12. 2020

너, 글 쓴 대로 살 수 있겠어?

나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어 놓는다는 것

 요즘 글을 쓴다. 무슨 용기인지 본명을 필명으로, 일기장에만 쓰던 글을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다.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이야기까지.


 하지만 지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험했던 일과, 그 과정을 지나오면서 내가 했던 생각이나 다짐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한 것으로 선별된 것이 아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고처럼 찾아오는 일도 있었고, 때로는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이 흘러가기도 했다. 어떤 순간에 내가 스스로 했던 인생의 선택마저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했던 내 인생의 여정일 뿐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했다. 나의 이야기와 생각들이 남에게 선뜻 보여주고 싶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으니까. 먼저 나 자신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 필요했다. '맞아, 내가 그런 사람인데 어떡하라고.'라는 뻔뻔함도 필요했다. 내가 지나온 길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담아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그리 흔하지도 않은 내 이름으로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나의 글을 하나씩 올린다. 댓글이 달리기도 하고 내 글을 읽은 지인들에게 카톡이 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아.


 그는 내가 가진 생각이 좋지만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다고 했다. 네가 캐나다에 살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 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너도 똑같을걸? 현실에 부딪히면 어쩔 수 없을걸?'이라는 말로 내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혹시 이렇게 공개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의 내용대로 살아야 한다는 임무를 부여받는 일인가?  글과 삶의 일치에  임감을 가져야 하는 걸까? 한국에 돌아갔을  내가 캐나다에서 생각하고 결심한 대로 살지 못한다면  글은 위선이 되나?



 문득 윤동주 님의 시가 생각났다. '쉽게 쓰여진 시'를 꺼내어 다시 읽어본다.


출처: 영화, 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일제 강점기 시대, 청년 윤동주는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는 조국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힘들었다. 무력감과 회의감에 시달렸다. 그는 땀내와 사랑내가 포근히 담긴 학비봉투를 받아 강의를 들으러 가면서도, 나 자신은 무엇을 바라며 홀로 침전하는 것인지 괴로워했다. 내 나라의 인생들은 살기 어렵다는데,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쉽게 씌여지는 시를 보며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마음속  자아를 두고 수없이 싸웠던  같다. 현실 속에 갇혀있는 자아, 그리고 자신이 닿고 싶은 자아. 그러나 그는 끝내 눈물과 위안으로 부끄러운 자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아의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을 떨쳐내고 끝없이 등불을 밝혔다. 밤비가 속살거리는 창밖의 어둠을 내몰 조국의 광복을 염원했다. 


 나에게도 닿고 싶은 자아가 있다. 현실 속 나의 모습과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은 이상적 자아. 그것은 결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때로 남의 나라 육첩방에 앉은 청년 윤동주처럼 끝없이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고 끝없이 등불을 밝히며 아침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두 자아가 화해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은 사람이 자아에 대한 고뇌를 멈추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고 반복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춘기 때 그 과정을 처음 겪는다. 그리고 나는 삼십 대 중반 지금, 여전히 n번째 사춘기를 겪고 있다.


 용기를 내서 나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내어 놓았지만 나는 가끔 두렵다. 그리고 부끄럽다. 내가 글대로 살고 있지 않을까 봐. 또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닿고 싶었던 나를 잊은 채 녹록지 않은 현실에 안주하며 살까 봐.

 하지만 두려움은 닿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일 뿐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청년 윤동주의 내적 갈등과 화합에 내 삼십 대 사춘기를 비교하는 것은 너무 거창하고 과분하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그의 시가 나에게 용기를 준다. 나의 글이 아무것도 아닐까 , 나의 글이 글뿐일까 , 두려워 멈추지 않겠다. 쉽게 쓰인 글이라 할지라도  또한 끊임없이 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리. 언젠가 닿고 싶은 나에게 닿게   날을 염원하며.



*커버 이미지 출처: www.ama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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