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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Aug 09. 2020

오늘도 내가 달리는 이유

 결혼 후 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어느새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결혼하기 전에는 밥도 한 번 안 해 본 나였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성취감을 느끼던 내가 지난 6년 동안 온전히 주부로 살았다. 주부 그리고 엄마라는 자리는 노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기 어려운 자리였다. 남편과 두 아이는 생각만 해도 나를 일으키는 소중한 존재였지만 내 마음속에는 요즘 말로 '경단녀'가 된 나의 인생에 대한 의문과 불안이 뒤따랐다.


 그러던 지난해 7월. 느닷없이 집을 나가 뛰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부탁하고 비장하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마땅한 운동복은 없지만 대충 집에 있던 운동화만 꺼내 신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딱 3분 만에 다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후들거렸다. 괜히 뛸 때마다 걸리적거리는 이어폰 줄을 탓하며 뛰었다 걸었다를 반복했다. 나 스스로 정한 시간, 40분을 겨우 채우고 집에 돌아와 뒷마당에 앉았다. 가쁜 숨을 고르며 해가 지는 모습을 보는데 무언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마음에 차올랐다. 뿌듯했고 행복했다.


 "그래, 이거야!"


  내친김에 동네에 있는 헬스장을 찾았다. 마침 운동하는 동안 만 3세부터 5세까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해서 남편도 함께 등록했다. 남편은 이제야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시작한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던지, 줄 없는 이어폰을 선물해 주었다. 선물 받은 내 이어폰을 들고, 아이들 없이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가질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처음 헬스장에 도착한 날. 엄마와 떨어지기 싫은 아이들을 겨우 어린이 프로그램에 맡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오전 9시인데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멋진 운동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 하나같이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앞, 뒤, 양 옆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운동이 익숙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전 처음 보는 운동기구를 사용하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고 어색했다. 첫날은 기구 사용법도 배울 겸 거의 남편을 구경하다시피 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 그 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나는 남편이 없이도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장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첫 날 보았던 그 멋진 사람들처럼 머리를 질끈 묶고, 운동복을 입었다. 남편이 사준 줄 없는 이어폰도 귀에 꽂고, 다른 사람이 아닌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나에 대한 생각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몸이 가벼워지고 체중계 숫자가 내려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특히 러닝머신 위를 달릴 때가 가장 좋았다. 예전부터 여러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좋아했지, 혼자 하는 뜀박질은 영 적성에 안 맞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40분 걷거나 뛰면서 예능이나 한 편 볼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하니 정신이 흐트러져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 대신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5년간 내 음악을 들을 일이 없었다. 차에 타서도 매일 아이들이 원하는 동요나 콩순이 오디오북을 들어야 했으니까.

 헬스장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러닝머신 위에서 나 자신을 만났다.

 ‘그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뭘까.’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러닝머신 위에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은 너무나 즐거웠다. 뛰느라 힘든 시간도 훌쩍 가게 했다.


 이제 달리기를 시작한 지 막 1년이 넘었다. 지난 1년 동안 달리기는 가장 나다운 나를 발견하게 했고 나를 나답게 살게 했다. 달리는 동안 나는 내가 참 마음에 들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누가 대단하다고 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참 멋졌다.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순간이 있다는 건 나를 자신 있는 사람으로 세워주었다.


 물론 나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 항상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내 안의 어두운 부분, 생각만 해도 쪼그라드는 나의 어떤 부분을 마주해야 했다.

'그때 이렇게 하지 말걸.'

'그때 내가 잘못했네.'

'나는 왜 이럴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달리기가 그런 나도 감싸 안으며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주었다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에 드는 순간들이 쌓여서 부족한 나도 나로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담을 수 있는 포용의 너비를 넓혀주는 것 같다.

'나한테 이런 면도 있구나.’

‘어쩌겠어, 뭐. 이게 나인걸.'

이제는 좀 더 ‘쿨하게’ 나다운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다지 멋지지 않은 나도 나니까.


 달린 지 1년이 되는 올해 여름, 나는 여전히 주부로, 엄마로 살고 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없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내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헬스장이 문을 닫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달린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집 주변을 달리고 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과 함께 마음에 쌓인 모든 쓸데없는 것을 비워버리고 오로지 나다운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숨이 가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탁! 하고 터져 나오는 숨이 얼마나 청량한지, 그 청량한 숨과 함께 마음속에 쌓여가는 자존감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커버 이미지:runsocie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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