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엄마가 코트를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재가 좋은 코트였다. 가볍지만 따뜻했고 보풀이 생기지 않아 늘 단정했다. 엄마의 소비 철학은 그랬다. 물건을 살 때는 질이 좋고 취향에 꼭 맞는 물건을 사서 오래 사용했다. 엄마의 옷장에는 많은 옷이 있지는 않았지만 오래도록 자주 입는 질 좋은 옷이 있었다.
엄마의 소비 철학을 나도 모르게 닮았는지 나도 물건을 그렇게 샀다. 무엇이든 사기로 마음먹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자고 마음먹은 후에도 아무거나 대충 사지 않았다. 친구랑 쇼핑을 갔다가도 내 마음에 딱 드는 물건이 없으면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왔다. 하나를 사더라도 제대로 된 것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으로, 꼭 필요했던 것으로 사곤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한국에서 제대로 샀다고 생각했던 물건이 캐나다에 와서는 옷장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캐나다 오고 6년째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가방, 코트, 부츠, 구두, 심지어 장갑이나 모자 같은 액세서리까지. 캐나다의 날씨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라이프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매일매일 출근하던 공무원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내 신분을 증명해야 하는 유학생일 뿐이다. 아니, 그것도 정확히 말하자면 유학생에 딸려 온 '동반가족'일 뿐이다.
'몇 년 살다 떠날 것'이라는 불안정함 앞에 이전의 소비 철학은 무용지물이다. 가구도, 옷도, 생활용품도 이 곳에 정착할 수 없는 나의 신분처럼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다. 특히 옷은 사이즈만 맞으면 완전 땡큐라는 심정으로 옷을 사고 있다. 서양인과 동양인의 체형 차이인지 몸에 맞는 옷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 수선비도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는 세탁소에 가서 몇 천 원이면 바짓단을 줄였지만 이 곳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수선비가 바지값만큼 나올 판이다. 그러니 점점 적당히 사이즈 맞는 옷 중에서 취향과 타협하게 된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었으니 소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내게 서글프지 않다는 것. 그게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내 발로 하이힐에서 내려와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이 곳에 왔다. 24살에 교직에 발령받았으니 정년까지 40년 가까이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며 살았을 거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안정적이라 행복해!' 하며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대답은 NO다. 고작 5년 만에 피곤했고 지루했다. 그래서 지금 운동화를 신고 마음껏 방황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비록 주먹구구식으로 산 물건들이 눈엣가시처럼 보이고, 그 물건처럼 나도 딱 맞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불안정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이 시간을 즐겨보려 한다. 불안정함은 또 다른 가능성과 기회를 의미하기도 하니까.
'캐나다를 떠날 때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처분하고 가볍게 돌아가야지!'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가뿐하고 후련하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되는 대로 걸려있는 저 물건들을 처분할 때쯤, 나는 또 어떤 신발을 다시 신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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