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홍보라는 직업을 택하면, 이런 고민 한번 쯤 하게 될 것이다.
대행사에서 경력 쌓고 인하우스 가야하나? 아냐, 그래도 인하우스(=기업)부터 시작해야지! 근데 꼭 대행사 경력이 있어야 해??
제목에서 봤듯, 정답은 없다. 순서만 다를뿐, 본인 성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루틴을 보면, 대행사에 있다가 1) 클라이언트에 스카우트되거나 2) 대행사 경력이 출중해 비슷한 산업군의 인하우스로 이직하거나, 아니면 아예 기업에 있다가 대행사 경력이 꼭 필요해 에이전시로 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 대기업 홍보팀이라는 직함을 가장 먼저 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일 잘하고 전방위적인 업무 수행 능력을 갖추고 싶다면 대행사 경력은 필수임을 말하고 싶다. 이유인 즉슨, 대기업에서는 대개 대행사를 끼고 일하는데, 알고 맡기는 것과 모르는 상태에서 다 해주세요 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더 딥하게 말하자면 대행사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담당자가 시키는 업무면, 대행사 입장에서 더 꼼꼼히 더 철저하게 하게 된다.
그리고 대행사에서 3년 이상의 경력을 갖고 있다면, (메이저 대행사일수록) 이직 시 플러스 요인이 2배 이상은 뛴다. '여기 빡세기로 유명한데, 여기 일 잘하기로 유명한데, 여기서 3년이나 버텼다고?' > 이것부터가 이미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특히 대기업이 아닌 이상 대개 홍보팀 인원은 소수이며, 대행사를 끼지 않고 인하우스 자체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 홍보의 atoz를 알고 있는 직원을 뽑는 것이 회사 입장에선 이익이지 않겠는가?
소인의 경우 기업-대행사-기업 순으로 거쳤기 때문에 양쪽의 생리를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각개 생리를 풀어보겠다.
#1. 대행사 썰
(다소 격한 표현이 있더라도 양해바람. 그러나 최대한 순화한 것임)
성향: 잘 굴러야 한다. 그곳이 어디든...
클라이언트와도 소통하고, 기자와도 소통하고, 대대행(이벤트 회사 or SNS 회사) 과도 소통하고, 우리 회사 팀장하고도 소통해야 한다. 즉 중간에 껴서 조율할 것이 겁나 많은 조직이다.
우선 대행사에 입사하면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로 일을 하게 된다.
1. 기업으로부터 대행 의뢰가 들어온다. 위에서는 이 기업 레벨이 우리 레퍼런스에 도움이 될 것인지, 돈이 될 프로젝트인지 심사숙고 결정한다.
2. PT 제안서를 만든다. 이때 각 팀별로 잉여인간 혹은 뛰어난 인간을 뽑아 팀을 꾸린다. 그리고 약 보름, 한달 정도 낮밤 없이 제안서를 만든다. 중요한 건, 팀원들이 출근하자마자 제안서 작업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각자 담당 클라이언트 업무를 1-2개씩 끼고 있고 제안서 작업은 플러스 요인일 뿐, 낮에는 기본 업무를 치고 오후 느즈막히 제안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을 새는 경우가 많다(라떼는..).
3. PT를 한 후, 떨어지면 그냥 나가리~(제안서 작성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여기 수고비... 이런건 없다), 붙으면 클라이언트와 업무스콥 및 비용 협의에 들어간다. 그리고 계약 쾅!
4. 제안서 작업을 했던 모든 인원이 업무를 맡는 건 아니고 여기서도 리더1, 팀원2-3명 정도로 새롭게 팀을 꾸린다.
- 자 지금부터가 본론 -
5. 종합대행사의 경우 언론홍보가 기본 업무다. 월 몇 건 이상의 보도자료 및 기획기사를 내야하고, 몇 개의 매체에 기사가 났는지를 kpi로 측정한다. 그러기 위해선 해당 산업군의 기자와 인맥을 쌓아야 하고 커뮤니케이션 능력 또한 좋아야 한다. 기자들 상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6. 뷰티 등 소비재의 경우 팝업스토어나 소비자 클래스 등을 진행하게 된다. 이럴 땐 이벤트 대행사를 끼고 하는데, 이를 대대행이라고 한다. 애초 클라이언트와 비용 협의 시 대대행의 fee를 감안한 금액을 청구한다.
7. 주간/월간/연간보고서를 클라이언트에 제출하는데, 계약서상의 업무를 잘 이행했는지, 부족한 부분+필요한 부분 등을 서로 논하고 협의한다. 저 보고서 쓰는 업무 또한 장난이 아니며, 기본자료 서칭 등은 대개 인턴이 맡게 된다.
- 자 지금부터가 더 본론 -
계약서 상, 돈 주는 클라이언트가 '갑', 일하는 대행사가 '을'이다. 갑질문화(?)가 만연해지면서 갑-을 관계가 마치 상하관계처럼 돼버렸지만, 갑이 필요한 부분을 을이 대신 해주는 '동등한 비즈니스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즉, 홍보대행사 직원으로서 갖춰야 할 중요한 자세가 '나는 컨설턴트다'라는 마음가짐이다. 나는 기사도 쓰고 기자와 얘기도 나누며 다양한 이벤트까지 할 수 있는 PR전문가다, 라는 자부심 팡팡 터지는 생각을 탑재한다면, 갑의 무리한 요구를 필터없이 받아들이는 yes맨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물론, 내가 만난 갑들은 상대적으로 천사표였다. 그래서 다음은 바로 옆, 바로 뒤, 바로 앞 동료들이 겪은 일화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 대행사 클라이언트 중 또라이라면 탑을 먹는 갑질 언니가 있었다. 유명한 일화가 너무 많은데 굳이 하나를 꼽자면...
매거진 2-3p 애드버타이징(광고기사)을 진행하는데 새벽 2시에 전화와서 '그거 이미지 바꿀 수 있죠? 맘에 안 드니까 다른 이미지로 교체해 주세요'라고 한 사건. 내일 아침에, 내일 오전에 전화해도 될 일을 본인 맘 편하자고 새벽에 다짜고짜 전화한 것인데 이건 숱한 횡포 중 하나에 불과했다. 왜저래? 라고 할 수 있지만 생각보다 유사 인간들이 많다. 그들은 생각하길, 대행사니까 항시 대기타고 내 요구 다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라는 이상한 마인드다.
특히 이러한 갑질은 주니어에게 많이 향하는데, 대개 인하우스 경험 없이 대행사부터 시작한 병아리들은 '아, 대행사는 원래 이렇구나, 대행사 직원은 그러려니 해야하는구나'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 수 있다. 착하게 받아주면 그들의 갑질은 하늘을 뚫고 날아오른다.
만약, 지금 당신이 저 비스끄리무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그나마 도움될 수 있는 상황 대처법을 끄적여보겠다.
지금 당장 사수나 팀장에게 말하시오! 라는 뻔한 얘기는 하지 않겠다. 물론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우리 직원 감싸면서 클라이언트한테 대드는 윗분은 없을 것이다. 그저 내부에서 '별 ㅆㄹㄱ 가 다있네!' 라고 욕하고 말 것이다. 정작 당사자만 시름시름 앓을 뿐이다...
우리는 회사밥먹는 직장인이고 같은 또라이가 될 수 없기에, 오히려 이런 인간 대처법을 몸소 익힐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찌됐든 클라이언트는 길어야 3년, 1년 내외면 교체되기 마련이다.
당장의 방법: 우선 딱 저런 상황이라면 절대 받아주지 말 것. 뭐지? 라는 시간에 전화나 요청이 온다면 씹을 것. 다음날 출근하고 '아 제가 퇴근하면 전화를 진짜 못받아요, 죄송해요, 전화소리가 안 들려요, 잤어요ㅜㅜ' 이거 몇 번 하면 전화 안 할 것이다. 그 이상의 또라이라면 사실 해당 기업에 다닐만한 인재는 절대 아닐 것이다.
기본적 방법: 가장 중요한 건 업무시간 내에 일어난 모든 일은 전화로 끝내지 말고 (요즘은 거진 톡으로 해서 증거가 남지만) 무조건 업무 이메일로 주고받아야 한다.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잖아요!' 라는 이상한 공격 들어올 수 있으니 무슨 일이든, 설령 '예, 알겠습니다' 이런 것 조차도 메일로 남기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대리님이 요리저리 하라고 말씀하신 건은 제가 저리요리하게 마무리 지었습니다.'라고 복기하듯 써서 보내야 한다. 중요한 건 절대 관련자들, 유관부서를 cc에 넣어 보낼 것. 상황에 따라 사장님까지 bcc로 넣어도 된다.
홍보인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발까지 알게 하라'를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일을 해야 한다.
사실 윗 방법은 홍보대행사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초년생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팁이다.